은은하게 흐물흐물해질거야

우석아 누나에게 힘을 죠

by H Jung

아직 쓸 때마다 어색한 2025라는 숫자. 2025년 올해는 조금 더 실행력 있는, 운동력 넘치는 한 해가 되길 바라는 바이다.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는 사람 중 한 명인 남편이, 지난주 호치민 여행 말미에 들른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통창 밖으로 푸릇푸릇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내게 말했다.


"그래서 당신이 결심하고 나서 실제로 한 게 뭐가 있는데? 말해봐."


쉬.펄. 내가 한 게 왜 없어!!! 꼭 도식화되고 숫자로 산출해 내야 해? 특히 10세 아동 엄마의 역할은 다 어디로 간 건데? 분하다. 분해. 순간 아 여행을 이렇게 망치나.. 하는 생각이 들어 화를 내려다가 정신 차렸다. 까짓것 해보겠어. 아니 해 내 '보이겠어'. 열심히 하고 변우석 덕질도 떳떳하게 할 거야! "우석아 누나에게 힘을 죠!!"라고 남편 앞에서 외치며 웃음으로 승화했지.


이후 성경말씀 묵상 후 기도할 때도 (주여 거친입을 용서하소서) 오늘 하루 조금 더 내딛을 힘을 주세요 하게 된다. 근데 이게 맞나? 하는 질문도 늘 따라오는데 뭐 사실 어쩌겠어. 그냥 하는 거지 모. 역시 늘 그렇듯 아무래도 일단 시작이야. 오늘도 내가 살아온 관성을 이기려고 매일 하기 싫은 것들을 조금씩 해본다. 무라카미 하루키 아저씨도 그랬다. 그만둘 이유가 많기 때문에 하는 거라고. 그러면 기분도 꽤 나아지고 좋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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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엔 장동선 박사의 인터뷰를 읽었다. 마음뿐만 아니라 뇌그릇도 넓혀야 한다고. ‘저 사람은 왜 저따구로 생각할까.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뇌길래 저러나?’ 싶은 때가 잦아질수록 ‘과연 내 생각은 과연 합당한 것일까?’ 의심해 보고 내 뇌그릇을 넓히게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왜? 편향적인 사고 및 사회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 특히 단절과 차단에 용이한 온라인보다 오프라인에서 서로 연결될 때 나, 너, 우리를 더 잘 인지하고 악순환을 저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좋아하는 한 문장이 떠올랐다. ‘아구럴수도있겠당’.

꽤 오래전부터 내 머릿속에서 리플레이되고 있는 개그맨 유세윤 씨의 인스타그램 소개 문구다. 몇 년 뒤 ‘그럴 수 있어’라는 양희은 님의 책도 나왔지만 (이분도 한참 전부터 늘 자주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 나는 틈새 없이 오밀조밀한 모음으로 가볍게 적힌 듯한 이 한 줄이 더 머릿속에 잘 맴돈다.


‘아구럴수도있겠당’ 내 스텐스는 유지하되 타인도 인정하고 품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문장. 솔직히 이해가 도무지 안 되는 상황을 처음 맞닥뜨리면 1차적 반응은 열받고, 2차로는 남편이랑 함께 욕하지만, 오프라인 모임을 겁내지 말고 더 자주 되뇌며 좁아터진 내 뇌그릇을 넓혀야지.




어제는 나 자신을 세 가지 단어로 표현해서 발표를 해야 할 자리가 있었다. 다들 JOY, 기쁨, 밝음 등 자신과 너무나도 어울리는 단어들을 잘 뽑아냈는데 전날 조금 망친 기분이 이어졌던 나는 마땅한 내 단어를 찾지 못했다.


“음... 저는 <은은한> 사람이고 싶은데 사실 이건 제 소원이구요. 굳이 찾자면 그냥 <무난한> 사람인 것 같아요.”


아 기껏 생각해 낸 게 무난이 뭐야. 정말 너무 맘에 안 든다. 근데 뭐 어쩌겠는가. ‘현기증 날 것 같으니까 빨리 다음 순서로 얼른 넘어가주세요’ 하고 있었는데 아뿔싸! 그게 각자의 닉네임이 된다는 것이다.


"‘JOY님’ ‘밟음님’ 그리고 ‘무난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WHAT?! 아.. 이건 아니지... 당황해서 “앗 그럼 ‘행복’으로 해주세요.” 라며 내 아이의 태명이었던 ‘행복이’를 말했다. 참나 내 뱃속에 있던 아이 이름을 내 이름으로 쓰다니. 진짜 오늘도 또 시트콤 같고, 그 가운데 제일 허당 캐릭터 같고. 어이가 없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친구가 말해줬다.

"사실 널 처음 봤을 때, 차도녀 깍쟁이 같아 보였지만 지내고 보니 웃긴 구석도 있고 ‘은은함’이란 단어가 너에게 있어. 잘 어울려."


아 마음 속에서 눈물이 광광. 고맙다. 나의 하루를 네가 아름답게 해 주는구나. 그래. 올해는 조금 더 운동력 있는 은은함도 챙기고 또 흐물흐물해질 거야. 잘 흡수하고 유연하기도 한 흐물흐물함. 장동선 박사가 말했던 갑각류가 탈피할 때 겪는, 가장 취약하면서도 성장하는 그때의 느낌 말이야. 하지만 거미줄 같은 흐물흐물함도 좋을 것 같아. 겹겹이 되면 총알도 막아내는 탄탄함도 있고, 비 내리면 빗방울도 이쁘게 맺히는 거미줄.


우연히 생각해 낸 거지만 웃기네. 찾아가는 서비스 아니고, 낚이면 잡아채는 서비스. 정말 나 같네.

아무튼! 은은하게 흐물흐물한 2025. 아주 반갑게 안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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