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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May 30. 2023

생각 '덜하기' 그리고 움직이기

비자발적 인간의 생존을 위한 자아탐구기 Ⅲ

발령 이주를 하며 느낀 감정과 발견에 관해 쓰는 이야기 중 세 번째.


육아서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과 종종 모이는 모임이 있었다. 시작은 육아서였지만 만나면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 자신이 본 영화나 책, 강연에 대한 리뷰를 나누고, 그 와중에 노화를 늦추는 뷰티 팁과 아이템을 나누는 등 여자 어른의 삶에 관해 대화할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늘 마무리는 술자리로 귀결되는지라, 가스 활명수에 소량 들어있는 알코올에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알코올 민감 자인 나는 늘 일찍 나오기 일쑤였다.


어느 더운 날에도 이제 곧 일어나려던 차였다. 모임의 리더 언니가 나에게 “넌 이 여름날 맥주 안 마시고 도대체 집에서 뭐 해?”라고 물었다. 순간 머릿속엔 당시 한창 꽂혀있던 한 가지 그림만 떠올랐다. 베란다 한 켠에 잎꽂이로 새로 뿌리를 내린 베고니아, 비실비실 힘없이 쳐져 있다가 어렵게 살려놓은 알로카시아, 작지만 어느 곳에 둬도 존재감 내 뿜는 밀리언하트와 립살리스 등. 각 특성대로 수분, 통풍, 광량을 조절해주면 저마다의 멋스러움을 뽐내는 식물들에 빠져있었다. 술자리보다는 베란다 1평에 쭈그려 앉아서 하는 분갈이와 물줄기를 쏘고 나면 올라오는 흙냄새가 좋던 나였다.


취기를 빌려 더 돈독해지는 그녀들의 시간이 부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속에 있는 걸 꺼내 말하고, 진한 애정 표현을 하고, 때때로 서운한 말을 하며 눈물짓기도 하는 건 내가 넘볼 것들도 아니었다. 나는 감정도, 정신도, 체력도 ‘나눌 수 있는 만큼만’ 내뱉을 수 있는 언어로 하는 것이 편안한 사람이었다. 무언가 과해져 실수를 낳고, 행여나 자책으로 이어지면 제일 괴로운 일이 될 터였다.

요즘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을 ‘내향인’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나는 이 단어가 꽤 마음에 든다. 어렸을 때부터 늘 부끄러움을 많이 탔고 내성적이면 안 된다고 배웠는데 이제 그래도 된다고 허용해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사실 대학교 때부터 20대 동안은 내 MBTI  첫 알파벳은 늘 E였다. 침묵을 못 참고 먼저 말을 하거나, 팀 프로젝트에서 발표를 담당하고, 자기소개서에도 늘 활발하고 명랑한 성격이라는 문장을 빼놓지 않았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엔 잠시 나의 사회적 스킬이 과하게 발현되던 시점이었던 것뿐이었다.

아이를 키우며 동시에 나(我)를 키운다는 육아 기간은 깊고 깊은 심해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던 내향적인 내가 수면위로 떠오르는 시간이었다. 아이와 단둘이 남는 물리적인 고립, 처음 겪어보는 에너지 고갈상태 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 부모님께 외향성을 강요받아 상처받은 내면 아이 등을 농도 짙게 경험해 보고 나니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지난날 왜 그렇게 낯가림이 심했는지 또 동아리 가입과 회식이 왜 꺼려졌는지 그 이유와 함께 ‘외향’은 내가 잠시 입은 불편한 옷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베트남에 와서 달라진 삶을 살고자 결심했을 때, 나는 주섬주섬 다시 그 옷을 찾았다. 내향성이 내 고유의 모양이기는 하지만 어떤 한 방의 에너지를 팡 쏘아 올릴 때는 외향적인 에너지가 유용한 터였다. 대신 억지로 흉내 내지 않고 내가 소화할 수 있는 만큼만 취하기로 했다.



■ 외출 전 떠오르는 생각은 치워두고 우선 가볍게 나가기로 했다. 외출 자체가 커다란 일로 느껴져 원래 늘 동선, 비용, 장소, 귀가 예상 시간까지 모두 완벽하게 계획되어야 외출이 성립되곤 했다. 여행계획도 지도부터 손으로 그려놓고 움직이는 사람이지만 크게 생각 안 하기로 했다. 이 시기를 과장 좀 하자면 “JUST DO IT”은 진짜 세계 최고의 슬로건이라고 매일 감탄하곤 한 것 같다. 맛집도 가고 박물관도 가고 로컬 문화공간도 다니며, 허탕 혹은 돈 버렸다는 생각이 들어도 깊이 후회하지 않았다. 안 하던 걸 시도했다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 20대 초반 어학연수 한답시고 뉴욕에서 1년 지냈 적이 있다. 당시 한국인은 한국인대로, 외국인은 외국인 대로 벽을 만들었는데 어차피 때가 되면 헤어질 것이라고 ‘이별’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빼고 돈독해져 귀국 후에도 때때로 리유니언(reunion) 시간을 갖는 그들을 나중에 발견했다. 아쉬운 건 나였다. 베트남에 머물기로 계약된 기간은 4년이다. 스치는 사람이 아닌, 인생의 새로운 인연으로 ‘만남’에 방점을 찍기로 했다. 두고두고 생각나는 아쉬운 인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인연 등등 정말 운명의 실로 이어진 듯한 인연들이 있다. 이곳에서는 그 시작부터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 부모님은 늘 빚지지 않는 삶에 대한 자부심이 있으셨다. 그걸 보고 자란 나는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신세를 지면 난리가 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사람인(人)자도 두 사람이 서로 기댄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너무 지나친 배려로 거리감을 유지하기보다 도움이 필요할 땐 도움을 요청하고, 누군가가 베풀면 넙죽! 감사히 받기로 했다. 요즘 우리 삶은 어찌 보면 Giver(기버, 주는 사람)의 삶만 강요되는 듯하기도 하다. ‘아니 나는 좀 받을래. 필요해.’ 욕심은 부리지 않되, Taker(테이커, 받는 사람)로서 누리는 것도 편안히 받아 들여보는 중이다.

■ 언젠가부터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만 혹은 비공개로 글을 쓰곤 했는데, 이상하게 늘 그게 한구석이 불편했다. 내가 숨어있다는 걸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모르더라도, 그것을 내가 아니까 편치 않았다. 그래서 다시 드러내놓고 소통하기로 했다. 내 안에 인정욕구도 있음을 깨닫고 밝은 곳으로 나왔다. 그렇게 내가 정한 경계선을 넓히니 내 틀이 넓어졌음을 느낀다. 오프라인에서도 생활감 넘치는 집 그대로 이웃을 초대하기도 하고, 학교에 가서 서윤이 엄마라고 인사도 한다. 나를 드러내는 것. 나쁘지 않은 새로움이다.

■ 상담원이나 판매원 같은 스치는 감정노동자들을 한없이 배려하고, 지구 편 너머의 빈곤에는 눈물이 나면서 오히려 오래된 친구나 주변인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있는 듯했다.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것도 귀찮다고 즐거운 무리를 관망하며 혼자 외로움을 자처하는 꼴이었다. 실제론 애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제는 생각날 때 안부 인사를 툭 건네본다. 전화는 잘 못하지만 잘 지내냐고 마치 헤어진 남친의 새벽 문자처럼 불쑥 연락만 해도 내 할 몫을 다 한 느낌이 든다. 그 와중에 마주치는 이웃과도 철판 깔고 스몰토크도 건네보는 중이다. 제일 고난도지만, 아무래도 아이와 노인은 편안히 받아줘 감사하다.

써놓고 보니 대단한 일이랄 것도 없지만, 쌓이는 경험과 기회 하나하나를 엮어나가 가는 게 삶이라 믿는다. 실제로 작년 어느 여름날에는 Just do it을 마구 마음에 새기다가 나도 모르게 삶의 한 매듭이 생겼다. 동네에서 보기 드문 쿠킹클래스 정보가 떴는데, 해당 음식이 뭔지도 잘 모르고 심지어 아이를 봐줄 사람도 없었지만 뭔지 모를 끌림에 일단 신청했다. 그건 바로 창고살롱 레퍼런서 두란님의 ‘고마워서 그래’ 하노이 쿠킹클래스였다. 레서피 뿐만 아니라 그녀의 담담하면서도 내공 있는 서사를 듣고 감동한 나는 주최자에게 다가가 도대체 창고살롱이 뭐냐고 물었다. 그렇게 그날의 Just do it을 시도한 결과 오늘 나는 창고살롱 Off 시즌 뉴스레터를 쓰고 있다. 몇 번을 생각해봐도 이건 과장 아닌 담백한 사실이다. 


나의 작은 움직임과 이로 만들어진 파장이 지금 당장 멋들어진 이력서 한 줄이나 자격증으로 표현될 수는 없겠지만 그보다 더 값진 것들이 내 안에 새겨질 것이다. 언젠가부터 막연히 ‘40대엔 나도 이 사장님이 될 거라고! 내 뜻대로 멋지게 살 거라고!’ 말하곤 했는데 (어린이가 나중에 커서 나는 대통령이 될 거야 하는 식의 꿈이다. 꼭 사업을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공교롭게도 주재원 파견 기간이 끝나면 딱 마흔이다. 빛나는 마흔! 그때를 위한 필수 자양분이 생성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Made in Vietnam! 두둥.



본 콘텐츠는 창고살롱Ⓡ 레퍼런서Ⓡ 이현정과 창고살롱이 공동 기획, 편집하여 유료서비스 구독 콘텐츠 서비스로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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