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건너오며 내가 챙긴 것들

비자발적 인간의 생존을 위한 자아탐구기 Ⅳ

by H Jung

발령 이주를 하며 느낀 감정과 발견에 관해/ 쓰는 이야기 중 네 번째.


“가족과 무인도에 간다면?” 하는 심정으로 준비한 해외 이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먼저 소유물에 대한 설명이 조금 필요하다. 우리 집 책상 우측엔 까만 Canon 복합기 한 대가 있다. 그리고 바닥에 붙여져 있는 네모 스티커에 쓰여 있는 내용 <제조연월일 2017년-6월>. 당시 신제품을 샀으니 늦어도 2018년에는 구매를 했을 테다. 그렇다면 결혼 5년 차쯤일 테고, 이것은 바로! ‘이혼서류’를 뽑기 위해 구매한 것이다. 내지 못할 사표를 안주머니에 품고 사는 직장인처럼, 부부싸움을 한 어느 날 미리 작성해 둔 이혼서류를 확 꺼내 보이며 ‘더 이상 못 해 먹겠네!’라며 버럭! 하고 싶은데 집에 프린터가 없는 거다. 연애 때부터 헤어지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고 서로 못 박아 뒀지만 그런 이성과 교양 따위 통하지 않던 폭풍의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 위협용 서류 몇 장을 피시방에 가서 뽑자니 모양이 빠지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를 아시는 동네 문구점엘 가서 ‘이 파일 좀 뽑아주세요’ 하기도 그렇고, 친구한테 부탁하기는 더더욱 거시기한 것이다. 하여 이 몸이 직접 이혼서류를 뽑고자 샀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지금까지는 이 복합기가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 �


KakaoTalk_20230427_115151535.jpg 안녕? 유용하고도 무용한 캐논


각자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구가 있을까? 나에겐 우리 집 4인용 월넛 식탁이 그러하다. 모든 공정은 수작업으로 이뤄졌고 못이나 나사 없이 암수짜임 형태로 접합 부분을 이어 흔들림 없이 가구의 완성도가 높다. 선 주문 후 생산 방식이라 어떤 무늬의 식탁이어도 반품이 불가했는데 옹이나 갈라짐 없이 완벽하고 멋진 나뭇결의 식탁을 배송받아 첫날부터 괜히 더 운명적이라고 느꼈달까? 디자인도 군더더기 없이 날렵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느낌의 진한 고동색이어서 사용할 때마다 더 맘에 들었다. 의자 등받이 각도도 적당히 기댈 만큼 편하고, 엉덩이가 닿는 면엔 오염에 강한 이탈리아 알칸타라 가죽을 내가 원하는 두 가지 색으로 특별 요청해서 제작했다. 우스갯소리로 우리 집에서 가족 다음으로 식탁이 제일 좋다고 할 정도로 내 최애 중의 최애다.


KakaoTalk_20230427_115544702.jpg 식탁 들어온 날 찍어둔 사진



그리고 작년 2월, 모든 살림살이 소유 여부에 재점검이 필요했다. 일반 이사보다 부피나 무게에 대한 환산 비용이 훨씬 크기 때문에 최소한으로 추려야 했다. 색이 다른 포스트잇을 갖고 집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폐기, 나눔, 중고 판매, 보관 등으로 나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식탁은 ‘당근~♪’으로 처분, 복합기는 바로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옆에 있다. 애정이고 욕망이고 뭐고 결국 필요한 게 선택됐다. 그것도 다른 짐들과 함께 선박으로 1~2달 걸려 받았던 것도 아니고, 입국 당일 잉크가 새지 않게 비닐에 꽁꽁 싸매고 보자기로 두른 다음 기내수화물용으로 직접 가지고 애지중지 모셔 온 유일한 가전이었다. 오자마자 처리할 서류들 스캔, 딸 수업 자료 인쇄 등의 용도로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이 복합기는 첫 구매 의도와 달리 열심히 다른 일만 하는 중이다. 너나 나나 장르가 확실히 반전 시트콤인 게 분명하다.

식탁, 침대, 소파 등을 포기했지만 대신 추가금까지 들여 챙긴 것들이 있다. 약 천 권의 책들. 견적서를 찾아보니 123박스 중 31박스가 책이더라. 태명으로 아이를 불렀을 때부터 공들여 쌓아 올린 시간은 아이와 나의 독서 시간이었다. 엄마 껌딱지인 아이가 잠시 나를 잊고 다른 세계로 가는 시간이기도 했고, 그저 종이 백여 장을 넘겼을 뿐인데 좀 더 나은 모습이 된 듯한 성장의 뿌듯함과 따스한 위로를 느꼈던 시간이기도 했다. 인생에서 멋지거나 닮고 싶은 사람의 공통적 키워드로도 늘 독서가 중심에 있더라. 어렵사리 쌓아 올린 이 시간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하여 좀 과하게 욕심을 내고 약 1년간 읽을 책들을 미리 구매해서 방습제 꼭꼭 넣어 배에 실어 왔다. 가져온 유일한 가구도 책장 7개다. 근데 이쯤 되면 마치 내가 엄청난 독서가 같지만 읽다 만 책도 수두룩하고, 종종 아이 앞에서는 책 사이에 휴대폰 숨기고 유튜브를 보기도 한다. 왠지 꼭 고백해야 할 것 같은 느낌 크크. 혹자는 전자책이 있는데 사서 고생한다고도 할 수 있다. 전자책 구독도 하고 있지만 9살 아이에게 권하긴 꺼려지거니와 나는 아무래도 붓 타령하는 선비 과인지 종이책이 더 좋아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



물건 외에도 우리가 꼭 ‘Must Have’ 리스트에 올렸던 것 중 하나가 있었다. 주재원 준비 중에 많이들 하는 자산 처분, 건강검진, 언어 공부, 모두 No. 우리 가족의 생존 및 무사 귀환을 위해 챙긴 것은 바로 ‘부부 상담’이었다. 이쯤 되면 우리 부부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 싶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또 아니 그러하다고도 할 수 없는 오묘한 상태라고나 할까? 별것도 아닌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번지는 싸움, 늘 그게 문제였다. 이혼이 선택의 문제이긴 하지만 하노이에 가면 의지할 사람이라곤 서로밖에 없을 테니 우리 집 복합기가 제 역할을 할 수 없도록(!) 꼭 가기 전에 상담받자고 서로 동의했다. 대기 시간엔 둘이 붙어 앉아 속닥거리며 놀고 있다가도, 들어가서 전문가 앞에서 대화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눈물이 나는 게…. 참으로 신비한 상담의 세계라지.

실로 자잘한 것들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나중에 먹으려고 한 쌍쌍바를 남편이 홀라당 먹어서 싸운 이야기, 도와준답시고 설거지를 했지만 사방에 거품을 튀겨놨길래 마무리 정리법을 알려줬다가 싸운 이야기 등…. 적지 않은 비용을 내고 고작 하는 이야기는 저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늘 모든 갈등의 이면엔 숨겨진 심리적 기제가 분명히 존재하기에 핀셋으로 콩 집듯 숨겨진 촉발지점을 찾다 보면 사랑하는 사이끼리 왜 그렇게 상처를 냈는지, 그 사소한 것이 왜 그리 거슬렸는지 알게 되었다. 그간 허비된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고, 서로가 측은해 보이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 쓸데없는 언쟁을 하다가도 그때를 회고하며 중심으로 돌아와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서로를 보면, 짐 정리 외에 정말 필요한 이사 준비 중 하나였다는 확신이 든다.

이렇게 해외 이사 준비를 하며 그간 살아온 방식과 소유물에 대한 취사선택이 이뤄졌다. 마음먹고 비우고 정리한 덕분에 물리적 공간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휴지통 비우기’ 버튼을 클릭한 듯 개운해졌다. 일 년을 지내고 보니 이 낯선 땅도 정이 들어간다거나 애정이 생긴다는 고백은 사실 여전히 섣부르다. 하지만 인생에서 소중한 것들을 톺아보고, 살아온 인생 전반에 대한 점검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음에 정말 감사하다. 아마 이 시간이 없었다면 이유 모를 답답함만 쌓이고 그 가운데 밀려오는 과제들을 그저 관성에 따라 쳐내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비자발적, 내향형, 주재원 가족 등과 같은 단어들은 내 정체성에 대한 명명이라기보다 내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의 키워드일 뿐 끊임없이 진화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결국 새로 비워낸 곳을 정리하고 채워나가면서 나를 믿고 훗날의 나를 기쁜 마음으로 꼭 안아줄 수 있도록 이 기간을 너그러이 통과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본 콘텐츠는 창고살롱Ⓡ 레퍼런서Ⓡ 이현정과 창고살롱이 공동 기획, 편집하여 유료서비스 구독 콘텐츠 서비스로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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