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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꽃 Sep 20. 2020

사유하지 못하는 죄

조지 오웰 <1984> 독후 에세이



조지 오웰은 작가가 글 쓰는 이유에 대해 크게 4가지로 정리했다.


1. 순전한 이기심(지식으로 주목받고 싶은 욕심)
2. 심미적 열정(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은 열의)
3. 역사적 충동(후세를 위한 보존의 용도)
4. 정치적 목적(이 세계를 어떤 방향으로 밀고 나가려는 사명감)

 나는 스스로 언어에 재능이 있고 불쾌한 사실을 직면하는 힘이 있음을 알았으며, 이것이 나만의 세상 같은 것을 만들어 일상생활의 실패에 보복해 주는 느낌이었다... 작가는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 이미 어떤 감정적 태도를 갖게 되고, 결코 여기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없다.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이미 작가의 마음 안에 정해진 언어가 존재하고, 글은 그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조지 오웰은 작가인 동시에 저널리스트였으며 현장을 사실적으로 기록하는 관찰자였다. 그런 그가 스페인 내전을 통해 좌파와 우파 간의 이념적 대립이 얼마나 치열해질 수 있는가를 몸소 체험하고 다수의 정치적 작품을 출간했다.  <1984>도 이런 배경으로 쓰였으니, 조지 오웰의 이론대로라면 '글 쓰는 목적' 3,4번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조지 오웰의 역작이면서 세계 3대 디스토피아 소설로 꼽히는 만큼 다양한 디자인으로 출간됐는데 공통적인 특징이 눈에 띈다. 선명한 빨간색과 지켜보는 듯한 눈동자이다. 이는 전체주의 정부와 인민을 지켜보는 정부의 감시망을 보여준다. <1984>는 자명한 전체주의 비판 소설이다. 이념과 독재가 인간의 어디까지 침투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지침서이다. 그런데 작품 속에서 유난히 포커스를 두는 것은 '군중'과 '무지'이다. 즉, 그릇된 정치체계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품고 있으면서 소설은 지속적으로 군중의 무지에 주목한다.

 

 작품 속 주인공이자 전체주의 사회 오세아니아의 당원인 윈스턴 스미스의 시선으로 묘사된 '이 분 증오' 시간을 살펴본다. '이 분 증오'는 영화관에서 약속한 시간대에 스크린에 송출되는 일종의 영상 광고 시간이다. 관중석에선 스크린에 나타난 반동분자의 얼굴을 향해 마음껏 야유할 수 있다.


'이 분 증오'가 끔찍한 것은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저절로 거기에 휘말려 들기 때문에 끔찍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느끼는 분노는 램프의 불꽃처럼 대상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바꿀 수 있는, 추상적이면서 방향 감각도 없는 감정이다... 인간은 때에 따라서 의식적으로 증오의 대상을 바꿀 수 있다.


선동의 강력한 무기는 감정이지만 감정은 쉽게 이쪽에서 저쪽으로 바뀔 수 있다. 당은 정치적인 도구로 '이 분 증오'를 상영했으나 군중에겐 현실에 쌓였던 울분을 분출하는(당의 비합리적인 방식에서 출발한 것일 수도 있는) 배출 시간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다수의 에너지가 향한 곳이라고 해서 꼭 그것이 정답인 건 아니다. 빅 브라더의 당 역시 이를 알고 있기에 철저히 모든 걸 컨트롤한다.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까지 관리하며 아예 감정을 일컫는 언어마저 금지하고 신어로 대체하기에 이른다. 언어가 공장에서 찍어내는 공산품처럼 복제되고 만다. 이는 인간의 이성이 생각으로 나아가 마침내 언어로 산출되는 사유 과정을 일체 막아버린 것이다. 당의 슬로건 역시 이러하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이를 뒤집어 생각해본다. 당의 평화는 전쟁을 통해 지속되며 예속은 자유이고 힘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낱말을 없애는 일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네... 자네는 신어를 만든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는 데 있다는 걸 모르나? 결국 우리는 사상죄를 범하는 것도 철저히 불가능하게 만들 걸세. 그건 사상에 관련된 말 자체를 없애버리면 되니까 간단하네... 언어가 완성될 때 혁명도 완수될 것이네.


당의 이념체제에 깊게 몰입한 윈스턴의 동료 사임의 말이다. (그 역시 뛰어난 사유로 인해 사라지고 만다.)  <1984> 속엔 여러 정치적, 이념적 일침이 묘사되었는데 그중 언어의 통제에 대한 지적이 매우 예리하다. 언어가 생각과 사유를 얼마나 주관하는지에 대해 일본의 작가 시라토리 하루히코는 <지성만이 무기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5,000개 이상의 어휘를 가진 사람은 500개 정도인 사람보다 어휘의 조합 수가 훨씬 더 풍부하다. 이는 발상의 다양함으로 연결되고, 어떤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도 손쉽게 찾아내는 강인한 해결력으로 직결된다... 간파는 멍하니 듣기만 하는 태도로는 불가능하다. 이는 말이나 문장 속에서 어떤 의미를 캐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어휘의 수"개념을 넘어서 인간의 통찰과 사유가 얼마나 중요한 밑천인지를 알 수 있다. 사유하는 한, 인간은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다. 반대로 사유하지 않고 무지하면 군중을 답습하게 되고 그 결과 선동될 위험이 다분하다. 윈스턴 역시 이를 본능적으로 경계했기에, 마음의 양심에 이끌린 나머지 펜을 들고 일기를 기록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만다. 당의 cctv, 텔레스크린이 인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에 그런 일탈을 들킬 경우 심하면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다.

 

 <1984>가 3대 디스토피아 소설로 꼽힌다고 했는데,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의 반대 개념으로 현실의 부정적인 면을 극단화한 가상현실을 뜻한다. 저자는 인간이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암울함을 '사유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꼽은 것이다.


어떤 면에서 당의 세계관은 그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납득하지 못했다.

 

작품 장면 장면마다 묘사한 이런 표현을 통해, 작품 속 비판의 대상이 단순히 '표면적 당의 모델'이었던 스탈린 독재정권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대상은 역사가 되풀이 한 무지의 모든 현장들이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 전범 재판 공방을 지켜본 유태인 저널리스트 한나 아렌트가 지성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었다. 그녀는 유대인 수십만 명을 몰살시킨 아이히만의 악함이 그의 천성에 있지 않고 '사고의 결여'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무지했던 독일 민중들 역시 대학살에 가담한 가담자가 되었다.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 지를 분별하는 것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사유함을 잃는 순간 사람은 이념의 도구가 될 수 있다. <1984>는 좁은 의미의 정치적인 소설이 아니다. 좁은 의미의 정치는 이념과 제도만을 의미한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정치는 '올바른 이끎'이다. 조지 오웰 역시 거대한 지배 체제의 벽을 통과하지 못하고 패배한 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 인류가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작품 속에서 철저히 일깨워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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