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카 비어만 <책 먹는 여우> 독후 에세이 1
직업상 동화를 자주 읽는 편이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동화를 꼽으라면 단연 이 '책 먹는 여우'를 고르고 싶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좋아하는 동화 분야에서가 아니라 내게 많은 깨달음을 준 책 중 하나라고도할 수 있지만 좀 머쓱하긴 하다.
"여우 아저씨는 책을 좋아했어요. 좋아해도 아주 많이 좋아했어요. 그래서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면, 소금 한 줌 툭툭 후추 조금 톡톡 뿌려 꿀꺽 먹어치웠지요."
<책 먹는 여우>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주인공 여우 아저씨는 책 먹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책을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먹고 소화'까지 해버리는 괴물 독자이다. 독특한 것은 그만의 책 먹는 방식인데 책에 소금과 후추를 뿌려 먹는다.
책을 왜 읽어요?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이라면 어느 정도 읽는 것에 관심이 있고 취미도 가지셨을 거라 짐작한다. 서점이든 도서관이든 책을 손에 쥐고, 읽을 때 주변에서 더러 저렇게 물어볼 때가 있다. 혹은 스스로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책 읽기가 인풋과 아웃풋이 바로 나오는 행위가 아닌데 "왜 책을 읽는가"하는 것이다. 나 역시도 책을 즐겨 읽고 이젠 업으로 삼아 코칭 일을 하고 있지만, 저 질문에 대해 속 시원한 답을 내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 분명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책에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책은 "이렇게 해"라고 독자에게 지시하지 않는다. 그저 들어줄 뿐이다.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더욱이 모모만큼 남의 말을 잘 들어줄 줄 아는 사람도 없었다.
모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아주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귀 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상대방이 그런 생각을 하게끔 무슨 말이나 질문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미하엘 엔데의 동화 <모모>에서 소녀 모모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마치 안부인사를 하듯이 고민하는 사람에게 "아무튼 모모에게 가보게!"라고 한다. 소녀 모모가 지닌 능력은 다름 아닌 '경청'이다. 모모의 눈을 보며 자신의 생각을 털어내고 쌓아놓은 말들을 내뱉고 나면 아주 어리석은 사람도 스스로 깜짝 놀랄 정도로 지혜로운 생각을 하고 있더란다. 독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독서는 읽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고쳐나가기도 하고 확신을 얻기도 하며' 재해석하는 힘을 길러준다.
저 옛날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했고 지금까지도 중요한 격언으로 언급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것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탐색할 수 있다. 그래서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도 인생을 '실험'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나. 예를 들면, 내가 인생에서 문제를 맞닿뜨렸을 때 어떤 식으로 해결을 해 왔었는지, 그 방식은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다른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 것인지, 나는 무엇을 할 때 기쁘고 즐거운 사람인지, 어떤 사고를 하고 행동을 할 때 불행하다고 느껴지는 등 셀 수 없이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살아가면서도 늘 우리 스스로를 알아가고 있다.
독서는 과정 중심이다. 작가가 제시해놓은 길을 걸어가며 끊임없이 의심하고 (지금 글을 읽는 이 순간에도 그렇게 하고 있다면 제대로 된 '읽기'를 하시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결론을 도출해낸다. 책 한 권을 통해 사람은 온갖 희한한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남과 다름"을 만들고 결국은 "가장 나다운 나"를 만들어낸다.
책 한 권을 읽고도 내리는 결론은 재밌게도 다 다르다. 동화책 한 권을 읽히고 아이들에게 "어땠냐"라고 물어보면 제각각이다. 재미있다, 없다로 결론짓는 경우도 많지만 "물고기가 불쌍했어요.", "주인공이 답답해요.", "주인공들 이름이 이상했어요." 등 기상천외한 독후감상에 할 말을 잃는 경우도 있고(뭐라 결론을 내줘야 할지 일종의 과부하가 걸려서) 정말 웃겨서 웃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독서는 저마다 가장 나다운 가치관과 나다운 길을 열어주는 생각의 장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독서를 통해서 현재를 만나며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제대로 선택해 나아갈 수 있다. 이뿐 아니라, 내 삶에 대한 긍정적인 힘을 부여할 수 있고 그 길을 걸어 나가는 힘을 얻어갈 수 있다. 책이 "그대로 가도 괜찮다"라고 함께 걸어주겠다고 늘 속삭여줘서이다.
즉, 책 한 권을 만난다는 건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의 가치까지 만나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주인공 여우씨의 식사 방식이다. 여우씨는 남다른 독서광(물론 다른 의미지만)으로 자신만의 탐독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소금과 후추가 그것이다. 식성도 명확하다. 소금과 후추를 뿌려먹는 것은 기본적으로 즐겨하는 식사 방식이지만 거기에다 즐기는 책의 종류도 있는 편이다. 한 번은 굶주림을 못 참고, 도서관으로 향해 몰래 책을 먹게 되는데 지리책은 한 입 베어 물고 바로 버린다. 그리고 "역겹다"라고 평한다. 자신의 입맛엔 맞지 않았던 것이다. 이윽고 소설책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꺼내 들고 아주 맛있게 책을 먹는다. 이 계기로 도서관 사서에게 발각되어 도서관에서 쫓겨나고 만다.
무슨 책을 읽어야 할까요?
책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겠지만 무슨 책을 읽을 지도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도 책을 읽으려는 시도를 해보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이내 지루해서 잠들거나 책을 바로 덮고 말았다고 토로한다. 우선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말해 우리나라 현대인들이 좀 바쁜 것이 아니기에 독서를 하고 사색을 하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지는 건 가히 불가항력적인 사회 시스템의 구조화로 인함이라고 생각한다. 위로 아닌 위로를 하자면 "그냥 맘에 들고 재밌는 것을 읽으시라!"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자네로부터 탐정 잡지를 받아 보는 건 멋진 일이 될 걸세. 탐정 잡지 안에는 정신적인 비타민과 칼로리가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다네.
-언어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친구 노먼 맬컴에게 보내는 편지 중
"그 사람이 아는 언어의 한계가 곧 그 사람이 사는 세계다."라는 (자칫 냉혹하기까지 한) 말을 남겼던 언어학자 비트겐슈타인 역시 탐정 소설 애호가였으며 탐정 소설 작가에게 팬레터까지 보내는 열성 독자였다고 한다. 그가 말하길 자신에게 탐정 잡지는 마치 '비타민'같다고 표현한다. 흔히 독서를 한다고 하면, 인문고전이나 철학서와 같은 두꺼운 양서를 읽어야만 할 것 같은 도덕적 의무감에 사로잡히고 마는데 그것은 스스로 만들어 낸 함정에 가깝다. 그 함정에 빠져나와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독서는 즐거운 시간의 땔감 거리가 된다. 자신이 끌리고 재밌는 것이면 뭐든 좋다. 그것을 읽기 시작하자. 그렇다고 해서 즐거운 사유를 방해하고 질도 낮은 텍스트를 무조건적으로 읽어내선 안 된다. 중요한 포인트는 "자신이 그것을 통해 즐거운 사고를 만끽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둬야 한다. 현재를 그저 현재로서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글이 아니라면 걸러내야 한다. 자극적인 낚시성 기사나 인터넷에서 쏟아지는 휘발성 글 등 자칫 유해할 수 있는 글은 지양하자. 체할 수도 있다.
불쌍한 여우씨는 결국 소화불량을 얻고 털에도 윤기를 잃게 되었다. 무분별한 독서의 폐해이다. 좋은 책의 기준은 많은 인문고전 전문가들이 이야기하듯,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중요한 통찰력을 담아내는가?"라고 볼 수 있다. 빠르게 흘러가는 요즈음. 정신없다. 마음도 허하고 불안하다. 자칫 우울감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무지의 심연 속에서 무지개다리를 건설해야 하지 않을까. 어두운 무지의 심연에 무지개다리를 나만의 방식으로 지어낸다면, 그 다리를 통해 어디로든 향해 갈 수 있을 것이며, 외롭지도 않을 것이다.
이렇게 <책 먹는 여우>를 통해 알아낸 깨달음을 정리해나갔다.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독서에 관한 철학이었으며, 또 하나는 '몰입의 정신' 즉, 마이스터 정신이다. 이 글에 관해서는 2편에 써 내려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