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너희가 행복하다면 됐다
본격적인 여행 준비가 시작되었다.
우선 세부 일정을 정하기 위해 가고 싶은 관광지를 찾아보기로 했다.
사실, 교사생활 12년 차쯤 되면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곳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아니 실은 그만큼 안 겪어도 충분히 예측이 된다.
우리 학교에서는 총학생회 주관으로 매년 한 번씩 문화의 날 행사를 하는데, 즐기고 싶은 문화행사를 매번 온전히 학생들의 뜻대로 정한다.
문화가 무엇인지 공부도 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문화활동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찾아도 보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다른 친구들에게도 알려줄 수 있게 자료도 만들어보고 발표도 해서, 전체 학생 투표로 결정을 한다.
함께 공부하고 준비할 때는 스포츠, 공연, 박물관, 미술관 등 제법 다양한 문화활동들이 등장하지만, 투표를 하면 결과는 열에 아홉, 놀이공원이다.
몇 년간 에버랜드가 부동의 1위를 지키다 한 번씩 밀려날 때가 있는데, 그때의 1위는 롯데월드다.
박물관을 가자고 발표한 녀석도, 투표는 놀이공원에 하는, 기승전 놀이공원이 우리 학교 총학생회 문화의 날이다.
언젠가 한 번은 아이들이 조금 더 다양한 문화활동을 경험해 보고 느껴봤으면 하는 마음에, 각종 사전교육과 설득을 총 동원하여 대학로 연극관람으로 문화의 날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새로운 활동에 좋아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솔직히, 놀이공원만큼 많은 학생들이 행복해하진 않는 것 같았다.
더 나은 선택, 더 좋은 선택은 무엇일까?
연극은 놀이공원보다 더 의미 있는 문화활동이었을까? 연극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놀이공원에서 얻는 즐거움보다 가치 있을까?
나의 판단은, 아이들의 판단보다 더 올바를까?
발달장애를 가진 우리 아이들의 판단력은, 자주 부족하다. 깊게 사고하지 못하고, 잘못된 판단을 할 때도 많다.
그럼 나의 판단은, 늘 옳고 정확한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자주 나를 돌아보게 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선택이라면, 아이들의 의견을 온전히 존중해 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무작정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줄 수는 없다. 한계는 분명히 존재하며, 인내하고 양보하는 것을 배우는 것도 필요하다.
학생들끼리 원하는 것을 정하다 보면, 주관 없이 타인의 의견에 휩쓸리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일방적으로 자신의 의견만 내세우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서로 의견을 조율하도록 하면 당당하게 친구에게 말한다. 네가 양보하라고.
우리 아이들은 장애로 인해 수많은 불이익을 겪기도 하지만 때로는 과도한 배려를 받기도 한다.
가족끼리 외식을 할 때 늘 본인 입맛 위주로 메뉴를 선정한다든지, 함께 먹는 음식을 혼자 다 먹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든지, 돈이 없이 편의점엘 갔는데 과자를 그냥 준다든지 하는 등이다. 호의가 반복되면 권리가 되듯, 배려가 반복되면 우리 아이들은 그게 당연한 줄 안다.
때로는 선의에서, 때로는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베푼 배려들은 우리 아이들을 더불어 살아가기 불편한 존재로 만든다.
일방적으로 퍼주고 양보해야만 하는 존재와 계속 함께하길 바라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늘 아이들에게, 너희는 이제 남에게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누고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충분히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양해와 친절에 기대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의 교육 목표다.
다수결에 따른다든지, 지난번에 친구가 양보했으니 이번엔 내가 양보한다든지, 제3의 다른 대안을 찾는다든지, 서로의 생각을 듣고 조율해 나가는 과정도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만큼 중요한 교육이다.
가이드북, 유튜브, 포털사이트 검색 등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오사카에서 가고 싶은 곳을 찾았다.
가이유칸 수족관, 덴포잔 대관람차, 돈키호테, 디즈니스토어, 시립 미술관, 하루카스 300, 구로몬 시장, 오사카성, 온천 등 다양한 장소를 제각각의 이유로 골랐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1순위로 꼽은 곳은, 예상한 대로, 유니버셜 스튜디오 재팬이었다. 에버랜드만 가도 환상의 나라인 양 좋아하는 아이들인데, 유니버셜 스튜디오는 오죽하랴.
티켓도 비싸니 하루는 온전히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숙소 근처에 있는 덴포잔 대관람차나 가이유칸 수족관도 가기로 했다. 나머지 관광지들이 몰려있는 시내의 난바, 도톤보리, 우메다 등에서도 원하는 곳들을 둘러보며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문제는, 온천이었다.
인력과 비용의 문제로 여행에 동행할 수 있는 교사는 제한되어 있고, 19명의 학생들 중엔 스스로 자기 관리를 잘할 수 있는 아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그리고 장애 특성상 아이들은 남학생의 비율이 높고, 교사들은 그렇지 않다.
온천을 제대로 누리려면 반나절은 머물러야 할 텐데,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남녀가 분리되어야 하는 문제 등으로 인해 교사 입장에선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일정이었다.
이런 사정들을 설명하며 설득을 시도했으나 아이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일본 가면 온천 한 번은 하고 와야죠!"
“온천에 가면 피로가 싹 풀려요.”
이유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정당한 주장을 일방적으로 묵살할 수 없으니 방법을 강구해 보기로 했다.
급히 검색을 해보니 소라니와 온천이라는 온천 테마파크가 오사카에 있었다.
거리도 멀지 않고, 온천탕뿐만 아니라 유카타를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게 일본 전통 느낌으로 내부가 꾸며져 있었고, 족욕만 할 수 있는 곳과 오락을 할 수 있는 곳도 있고, 옥상 정원도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이 정도면 온천탕을 즐길 수 있는 아이들은 즐기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할 거리들이 충분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온천탕 외에는 성별에 따라 분리될 필요가 없다는 게 인솔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좋아, 온천도 가자."
와아! 목놓아 온천을 부르짖던 아이들이 기뻐했다. 남아있던 찜찜함이 조용히 사그라졌다.
그래, 너희가 행복하면 됐다.
그렇게 대략적인 여행 일정을 정했다.
다음 시간에는 상세한 코스와 일정을 정하고, 근처의 맛집들도 찾아보고, 예상비용도 계산해 보기로 했다.
설렘이 더 커진 첫 졸업여행 프로젝트 수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