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곳에 19년을 머물렀다
나는 한 곳에 19년을 머물렀다. 학교가 개교하던 해에 입사를 했고, 어쩌면 평생직장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발달장애인을 위한 뚜렷한 비전과 미션을 가지고 있었고,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이 없어 근무조건이 열악한 대신 우리가 원하는 다양한 방식의 교육을 시도할 수 있었다.
나는 19년간 수백 명의 발달장애인을 만났다. 대부분 경계선급의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고, 취업과 자립을 목표로 하는 성인이었다. 누군가는 중증장애인에 비하면 큰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만난 그들은 중증장애인과는 또 다른 욕구와 심리정서적 어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비장애와 장애의 경계선에서, 남들처럼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에 좌절하고 분노하고 때로는 회피하고 부정하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주변을 무너뜨렸다.
나는 힘들기만 했던 그들의 학창 시절과 관계의 아픔을 작은 성취의 경험과 수용, 인정이라는 이름으로 보듬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들은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변화했다. 누군가에게 별 것 아닌 변화일지도 모르지만, 그 작은 변화들이 쌓여 그들의 삶이 달라지는 순간을 나는 수없이 목격했다.
내가 늘 품고 있는 마음이 있다. 검은 물이 가득한 컵에서 검은 물을 없애는 방법은 억지로 퍼내는 것이 아니라 맑은 물을 지속해서 흘려내는 것이라는 것. 당장은 검은색에 가리어 티가 나지 않을지라도, 때로는 내가 함께하는 짧은 기간 동안 변화가 눈에 띄지 않을지라도, 지치지 않고 꾸준히 흘려내다 보면 언젠가는 깨끗한 물이 컵에 가득 찰 수 있을 테니. 그런 마음으로 매해 내가 만나는 발달장애인들에게 맑은 물을 다양한 방식으로 흘려보내려 애썼다.
수업으로, 활동으로, 관계로, 때로는 기다림으로. 그 애씀은 학생들의 웃음과 작은 변화로 돌아와 나에게 힘이 되었고 위로가 되었으며, 내가 19년간 그곳에 머무른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맑은 물이 흐르게 하고 싶었던 나의 마음과 달리 나를 둘러싼 환경은 오랫동안 고여있었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처음 세웠던 비전과 가치는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중요했던 일들은 밀려났고, 조직의 방향은 내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과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 간극이 나의 노력으로 메울 수 없을 만큼 벌어졌다고 느꼈을 때,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나에게 맡겨진 학생들에게 미안했고 걱정도 몰려왔지만 그 때문에 버틴 세월이 이미 너무 길었다. 더 머물렀다가는 나도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 그냥 그런 교사가 되어 있을 것 같았다.
학교가 처음 세워지고 내가 입사했을 때 그곳에서 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우리는 같은 꿈을 꾸고 열정도 남달랐다. 그 시절 학교에서 밤도 새워가며 처음의 것들을 만들어 가는 기쁨에 사로잡혔었다.
그런 우리기에 발달장애인을 위해 우리가 사용되는 것에 대한 소망과 비전이 있었고 늘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나의 퇴사는 끝이 아니라, 그 꿈을 다른 방식으로 펼치기 위한 선택이었다.
남편을 포함해 나보다 먼저 두 명의 선생님이 사회적협동조합을 준비했고, 발달장애인 예술가를 지원하는 <팔레트 스튜디오>를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퇴사를 앞두고 있던 12월, 조합인가를 받았다. 운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조합을 만드는 어려운 과정을 이미 통과한 그 자리에서 나는 새로운 시작 앞에 서게 되었으니까.. 물론 인가를 받았다고 끝은 아니었다.
함께 일할 동료가 필요했다. 당분간은 임금을 줄 수 없지만 같은 비전을 품고 마음을 모아줄 수 있는 든든하고 유능한 동료가.
솔직히 그때는 우리가 자리 잡기까지 기간이 얼마나 걸릴 지도 짐작할 수 없는 막연한 상황이었다. 무모한 도전일지도 모르는 길을 함께 걸어줄 동료가 있을까 걱정이던 찰나,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 나와 13년을 함께했던 동료 Y가 퇴사를 했다.
새로운 시작을 돕는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물론 퇴사의 이유는 마음 아프고 속상한 일들 뿐이지만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그 또한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기 위한 뜻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Y와 나는 <길 위의 스튜디오>를 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