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시간을 허송세월이라 생각하지 말아요

#69. 심리상담센터 선생님의 조언 3

by 풍선꽃언니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갑옷을 입어요
나 자신을 인정 못하니까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으로
내 가치를 확인하려 하니까요


비말 차단용 가림막을 사이에 두고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상담의 시간.

벌써 여섯 번째.


아픈 발가락으로 행동이 굼떠져 집에서 넉넉한 시간 텀을 두고 출발했는데 7분가량 늦었다. 약속에 늦었다는 게 멋쩍어서 잠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은 나를 탓하지 않았지만 나는 늦어서 죄송해요, 하는 마음에 위축된 채로 시작된 선생님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번 주는 어떻게 지냈어요?"

별일 없었어요. 다만 엄마의 죽음에 내가 더 할 수 있는 건 없었는지 우울이라는 게 그 당사자 마음 밖에서는 잘 알기가 어려운 것이라서 엄마 혼자 앓게 한건 아닌지 그런 것들이 괴로웠어요. 얼마 전에 저희 엄마와 같은 케이스로 사망한 엄마의 따님이랑 연락이 닿아 얘기를 나눴어요. 그 분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지금도 엄마가 자살인지 사고인지 생각하곤 해요

"이미 사고로 결론이 났지만 자살이라면 Y(나)씨에겐 어떤 생각이 드는데요?

엄마가 저를 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엄마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었다. 무엇을 하든 자신은 열심히 하는데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 가정주부밖에 못되었다며 한탄했다. 엄마의 세상 안에서 엄마 여건의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엄마는 내가 마음껏 꿈꾸기도 하고 방황하기도 했던 이십 대에 덜컥 결혼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안 되어 돈 벌어오라는 등 떠밀림에 꿈 한번 꾸어볼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직장 다니다 좋은 남자 만나 그 집을 탈출하는 게 최선이었다는데 엄마가 죽고 나서야 엄마 인생 단면 단면을 짚어보며 비참했을 순간들이 떠올라 가슴이 아프다.


아빤, 성실한 사람이다. 감수성이 풍부하지만 감정이 혼란스러울 상황에선 회피해버리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나는 아빠와 항상 잘 맞다고 생각했는데 아빠는 알고 보면 감정을 어루만지는 능력이 미숙한 사람이었고 기대고 싶은 엄마와 피곤함을 피하는 남자 사이엔 서로를 채워주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아빠를 만나서 많이 의지했고 아빠는 엄마를 만나서 사람의 온기를 느꼈다고 하니 이만큼 함께 살았고 엄마 떠난 자리가 아픈 거겠지.


나와 내 동생은 대단한 성공을 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저 요즘 같은 시기에 때맞춰 취업하여 밥벌이하고 결혼하고 해서 속 썩이지 않을 딱 그만큼 열심히 살았던 남매였다. 그것이 부모님한테 얼마나 삶의 보람이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일단 나는 사는 동안 정말 뭘 하든 <잘 해내려고> 애쓰며 살았다.


내 힘의 원천은 엄마,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나는 내 삶에서 많은 꿈을 꿨다. 직업을 바꾸는 것을 비롯해 인생 단계마다 선택을 할 때 엄마 의견은 "아주" 중요했다. 엄마는 엄마가 가지지 못했지만 원했던 것들을 나에게 요구했고 해내는 나를 보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런 생활이 익숙해지다 보니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나는 늘 <달리는 말>이어야 했다. 내가 지쳐 쓰러지기 전까지 달리다 마침내 멈추면 패배의식에 젖었다. 그렇지만 또다시 일어났고 열심히 살아야지, 이를 악물었다.


사실 그렇게 이루었던 것들이 뭔가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놓으라면 놓을 수 있는 것들, 가령 직장만 해도 그냥저냥 남편에게 기대 살면 된다고 좋게 좋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다. 엄마의 죽음 앞에 내게 가치 있게 느껴지는 것은 현재로서 아무것도 없다. 나는 지금 번아웃 상태와 비슷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선생님, 저는 열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허송세월 보내고 있는 지금 시간들이 한심해요.
이직하겠다고 해놓고 공부도 집중이 안돼요
그래도 뭔가 해봐야 할 것 같아서 대학원 원서는
넣어보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선생님은 내 얘기를 죽 듣더니 말씀하셨다.

스스로의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갑옷을 써요.
내가 나 자신을 인정 못하니까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 하니까요.
나의 가치를 확인하는 데는 엄마가 지배적이었기에
그 대상인 엄마가 없어지니 그렇게 힘든 거예요.
부모교육에는 세 가지 주제가 있어요.
자신. 타인. 세상에 대한 관점이요.
Y 씨의 성장 환경은 <나의 가치의 소중함>을 배우지 못한 환경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좀 아무것도 안 하면 어때요. 천천히 하세요.
Y 씨는 지금 꼭 필요한 것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를 치유하는 시간. 그게 왜 허송세월이에요?
눈에 보이는 결과물만 의미 있는 게 아니에요
지금이 허송세월이라 한다면 그 허송세월을 보내세요.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픔을 겪고 있는 이 시간에 나는 내가 무념무상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간단한 일들을 하면서 보낼 수도 있는 것이다.


꼭 이직에 성공하지 못해도, 꼭 대학원 학위를 못 따도 내 인생이 흘러가는 데는 큰 지장이 없다는 것을 안다.


흘러가는 대로 살아봐도... 난 괜찮다.


내가 무엇을 하길 채찍질하는 듯 보여줘야 할 대상도 없어진 마당에 내가 좀 자유하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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