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어떤 모습도 사랑해
#87. 슬픔을 회피하는 아빠를 향한 고백
TV프로 <세상에 이런 일이>를 보는 중이다. 85세 할머니가 20년째 매일 죽은 남편의 묘소를 찾는 얘기가 나온다. 긴 세월을 혼자 살아간다는 게 보통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닐 것이다. 코끝이 찡하다.
세상의 이런일이에 나온 사별 20년차 할머니TV 속 할머님은 지난한 세월 그렇게 먼저 가서, 힘들었노라. 그래도 남은 인생 잘 살다 왔다고 말하고 싶다고 하신다. 아빠는 이 대목에서 벌떡 일어나 자리를 떴다. 감정이 불안해지니까. 티브이를 보는 내내 혼잣말을 하며 괜찮은 척하더니만.
"저 사람이 85살인데 남편은 몇 살에 뭐하다 죽은 거지?"
"아 사진 보니 딸만 둘 낳았나 보구나"
결혼하고 아빠와 합가하면서 미혼 때 모르던 아빠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발견한다. 낯설다. 그러면서 아빠 들으라고 내게 푸념하던 엄마의 잔소리들이 오버랩된다.
얘, 너네 아빠가 얼마나 웃긴 줄 아니
퇴직하고 나서 아빠가 밖에서 일만 하느라
집안일에 생전 관심도 없던 사람인데
잔소리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 엄마 돌겠어.
주말에 친정에 가면 늘 호탕하기만 하던 아빠였다.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 앞에 둘러앉아 왁자지껄 술이나 마실 땐 몰랐는데 요즘의 아빠는 반찬 타박에 정리 광이 되어 날 쫒아다니며 잔소리를 한다. 나도 사람인지라 짜증도 내고 오늘같이 비 오고 센치해지는 날엔 잔뜩 예민해져서 입을 닫아버리기도 한다. 아빠와 기분 주파수가 같을 땐 괜찮은데 다를 땐 서로를 스트레스로 여기기도 하면서 살고 있다.
너도 엄마한테
너무 자주 가지 마라
자꾸 생각나니까
아빠는 TV 속 할머니와 달리 엄마를 잘 찾지 않는다. 연약한 아빠 심연이 뒤틀리기 때문이다. 내가 억지로 권유해 다섯 번만 가달라고 사정사정한 상담도 지난주 일요일로 마지막이었는데 그 마저도 자꾸 잊고 싶은 기억을 상기하게 된다며 갈 때마다 무척 짜증을 냈다. 상담 선생님의 말 중에 <아빠가 내면의 뿌리가 강한 사람>이라는 말이 위로가 된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아빠는 내게, 평생 지켜줘야 하는 아내를 잃었다며 술만 먹으면 감정이 흔들려 푸념을 한다. 그러다 내가 힘들어하면 화를 낸다. 너 때문에 또 생각이 난다며, 네가 문제라고.
아빠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시간 여유되는 친구들과 한잔하면서 평상을 찾아가기 위한 노력이지만 나는 아빠가 좀 더 슬픔에 직면하고 애도했으면 좋겠다. 고여있는 아픔이 언젠가 아빠를 좀 먹을까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상담 선생님이 <애도 방법은 다 다르다>고 설명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빠가 엄마를 잃어 슬픈데 왜 나가서 노는 걸까,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 아빠는 은퇴한 친구가 지자체에서 분양받은 작은 텃밭에 고추를 따러간다고 나갔다. 일전부터 얘길 하길래 아빠가 소일거리로 농사를 지으면 어떨까 해서 말을 꺼냈는데 "미쳤냐" 소리만 듣고 끝이 났다. 여름 작업용 조끼를 입으며 집을 나서는 아빠를 보며 코끝이 시큰했다. 고추 따오면 엄마는 대단한 리액션을 보이며 아빠를 칭찬해줬을 텐데 지금은 집에 그런 걸 봐도 시큰둥한 딸만 있어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렇지만 아빠,
난 아빠의 모든 것을 사랑해요.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요.
지금은 우리 가족 좀 힘들지만 곧 좋아질 거야
내가 힘내서 좋은 모습 보여줄 거니까
오늘은 비가 올락 말락 흐린 날씨의 하루다. 여러 가지 상념에 젖어 일상 단상을 적어보았다. 늘 느끼지만 나의 조악한 언어 실력으로 감정을 푼다는 게 참 어설프다. 아빠에게 표현하는 내 애정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겠다.
우리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집의 거실에서언젠가 아빠가 떠나면 오늘이 그나마 나았다며 그리워하게 될까. 그 언젠가가 한 삼십 년쯤 뒤에 일어나면 내 마음이 조금은 덜 아플 텐데. 아빠가 오래오래 살아주길 바란다. 요즘 아빠가 자주 어지럽다고 한다. 기립성 저혈압이라는데 약이 있는 건 아니라고 한다. 아빠가 고추를 실컷 따는 동안 기립성 저혈압에 좋은 게 뭐 있는지 잘 찾아봐야겠다. 아빠 아프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