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저녁 친구의 텃밭에서 아빠는 고추와 상추를 봉지봉지 잔뜩 따왔다. 자랑스러운 듯 엄청난 야채를 가져왔다며 먹어보라고 호들갑을 부렸다. 실한 고추와 상추. 한결 기분이 좋아진 아빠를 보니 마음이 흐뭇했다.
아빠가 <안매운고추>와 <매운고추>를 구별해 자랑하고 있다.
친구와 한잔하고 들어오는 날 집에서 2차로 뭘 먹고 싶다고 할 때가 없었는데 웬일인지 김치전이 먹고 싶다고 전화가 왔다. 나는 전화받자마자 쉰 김치를 꺼내다 부침가루에 튀김가루를 싹 섞어서 재깍 반죽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아빠와 나는 요즘 이틀에 하루 꼴로 술이다. 아빠는 내게 술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고 걱정을 하지만 정작 웃음을 잃어버린 아빠가 나랑 술을 마시며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아빠는 전 종류에 있어서 만큼은 내가 엄마보다 낫다고 했다
"나는 너랑 사는 것보다 독립을 해야 할 것 같다"
이건 또 무슨 날벼락같은 소리인지. 친구들이랑 놀면서 무슨 얘길 듣고 온 거야. 술 앞에 두고 짜증이 확 올라왔다.
"아빠, 난 그럴 마음이 전혀 없어. 아빠 죽을 때까지 같이 살 거야. 아빠의 오락가락하는 의견은 중요치 않아"
아빠는 말했다.
"그럼 내 외로움은? 친구들한테 내가 다 물어봤는데 지금은 네가 있으니 고독함이 절박하지 않아서 노력을 안 하는데 사람을 만나려면 칠십 대가 되기 전에 만나야 한다더라.내 외로움은 네가 채워줄 수 있는 게 아니거든"
하.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아빠 의식이 젊은것은 인정한다. 외모도 67세 나이에 비해 훨씬 관리도 잘했다. 엄마가 아빠랑 나이 터울이 많다 보니 어린(?) 엄마 덕에 그만큼 젊게 살았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엄마 죽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외로움 타령을 한단 말이야.
"아빠, 여자 친구 사귀는 건 그렇다 쳐. 그럼 난 곧 있으면 마흔인데 새엄마가 생기는 거야?"
"아니지, 그냥 아빠가 여자 친구가 생기는 거뿐이지"
"아빠가 사람을 만나 행복하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만날 사람은 있고?"
앙칼지게 반응하는 내 태도가 마음에 걸렸는지 아빠는 평소보다 언행에 완급조절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 당장 만나는 사람을 찾겠다는 건 아니고 기회가 되면 그럴 수도 있다 이 말이지"
"그래서 독립을 하겠다는 거야?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은데?"
아빠의 이상형을 물어봤다.
"나이가 오십 대 후반에서 육십 대 사이에, 외국어도 좀 할 줄 알고 같이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사람. 술도 좀 하고. 엄마가 키가 큰 축에 속했으니 좀 아담하니 예쁜 사람을 만나고 싶어"
나는 그냥 웃었다.
"아빠 그런 사람 없어. 그런 사람 찾고 나면 그래 원하는 대로 독립하셔"
사별한 아빠가 여자 친구를 만나도 되냐는 식의 질문을 할 때 딸은 이게 참 난처하다. 아빠의 행복을 생각하면 토 달고 말 것도 없이 아빠가 원하면 그렇게 하시라고 해야 하는데 막상 엄마가 눈에 밟혀 <새엄마 생기는 거냐>는 둥 헛소리나 하게 되고. 그나저나 아빠의 여자 친구 문제는 지금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육십 대 후반 이제 할아버지 다되는 마당에 아빠 눈이 너무 높아서.
오늘 상담센터에 다녀왔다. 이 얘기를 선생님과 나눴다. 선생님이 웃었다. 그거 여기 와서 선생님이랑 같이 정립한 이상형이라고. 근데, 아빠 여자 친구분 만나기 힘들 거 같다며 선생님도 웃고 나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