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풍선꽃언니 Mar 24. 2022

나도 외제차를 사고 싶다. 딱 한 번만

남편의 사투

남편과 나는 결혼 전까지 뚜벅이였다. 그게 불편한 적도 부끄러웠던 적도 없었다. 어쨌든 우리가 만나 사랑한 십 년간 우리는 가고 싶은 곳이라면 버스를 타든 지하철을 타든 심지어 배를 타고서라도 찾아갔다. 대치동에 살던 남편과 일산에서 살던 내가 청량리에서 만나 열차와 버스 배,

튼튼한 다리를 이용해 꼬박 하루 반 걸려 소매물도 같은 섬엘 다녀온 적도 있었다. 힘들지 않았다. 둘 다 직장이 생기고 나선 수없이 많은 곳을 비행기로 여행 다녔지만 지금 생각하면 상상만 해도 기 빨리는 소매물도까지의 여정이 굉장히 낭만적인 추억으로 남아있다.


결혼을 하고 부득이하게 차가 필요해졌다. 남편의 직장은 시종일관 서울이었지만 나는 주로 오지라고 불릴법한 곳으로 발령받아 다녔다. 밑도 끝도 없이 새벽에 갑자기 씻지도 않고 출근해야 하기 일쑤였다. 카카오 택시 같은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시간엔 난감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장롱면허인데 덜컥 차를 샀다. 남편도 나도 운전에 자신이 없어 같이 근무하던 주무관의 차를 단돈 60만 원에 인수했다.  무려 20년 된 중고 베르나였다. 우리는 그 차를 겁먹은 흰둥이라고 불렀다. 헤드라이트 부분이 고속도로에서 차선 하나 못 바꿔 벌벌 떠는 우리 표정을 닮은 하얀 차였다.


갑자기 없던 차가 생기니 신기했다. 서른 살에 생긴 첫차. 필요에 의한 운전이었기에 당장 "차가 있음" 만으로도 우리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고 행복했다. 흰둥이는 주차하다 말고 보도블록에 올라가기도 했고 소화전에 들이 받치느라 우리와 지낸 시간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우린 정성 들여 세차를 했고 때 주차하고 집에 올라갈 땐 고맙다고 인사를 했을 만큼 애지중지 했다.


현재의 차를 만난 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시동생이 남편에게 빌린 돈이 있었는데 받아오라고 하니 돈 대신 차를 받아왔다. 당장 차를 몰고 다니려면 보험료도 내야 하고 할부 값도 내야 하는데 시동생은 원치 않은 실직 상태였기 때문에 돈을 갚을 여력이 없었다. 할부 잔여금을 우리가 갚는 조건으로 2015년식 스파크가 우리 소유가 되었다. 스파크에는 흰둥이에겐 없던 후방카메라가 있어 훨씬 타고 다니기 편했다. 경차 전용 주차장이며 하이패스 할인이며 경제적으로 유익했다. 우리는 새로운 우리 차를 쪼꼬미라고 불렀다.


쪼꼬미와 함께 우리는 지방 곳곳을 여행했다. 동해 삼척은 몇 번이나 갔고 출장 때 보령이니 태안이니 요리조리 몰고 다녔다. 차선을 변경할 때도 좁은 간격에서 쏙 끼어들 수 있어서 편리했다. 옆에 버스나 화물차가 지나가면 우리 쪼꼬미가 옆으로 흔들리는 느낌이 감지되어 무서웠지만 그래도 우린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차란, 굴러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과 한 집에 한대 있으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얼마 전에 아빠랑 남편이랑 모터쇼에 다녀왔다. 얼마나 차에 문외한이었는지 KN이 기아차라는 것도 그날 알았다. 남편과 아빠는 온갖 차가 전시되었는 그곳에서 물 만난 고기가 되어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남자들이 원래 차에 미치는 종족인 건지 내가 무심한 건지 두 사람은 신났는데 나는 실내가 더워서 짜증 나고 지루하고 졸렸다. 그러다 어떤 수입차 매장의 푸르스름한 차에 멈췄다. 남편은 나에게 앞에 타보라는 둥 옆에 타보라는 둥 시승 대기줄에 나를 몇 번이나 다시 세우곤 좋네, 한마디에 딜러를 불렀다. 옆에서 아빠도 남편에게 차가 좋다고 뽐뿌를 하며 상담실로 올라갔다. 지금 이 전개는 뭐지 어어 하며 얼결에 나도 따라 올라갔다.


영업사원의 현란한 말솜씨는 대단했다. 나마저 갑자기 이 차를 꼭 사야만 할 것 같은 충동이 밀려왔다. 가격이 얼만데 묻고 전기차라 보조금까지 하면 이 값으로 아우* 절대 못 사죠. 네네. 계약하시겠어요? 네네. 대기가 길어서 지금 계약해도 내년 팔월은 넘겨 인수하실 수 있으세요. 네네. 아이, 사모님 일단 계약금 거시고요 출고 전에 언제든지 취소하고 전액 환불 가능하니까 염려 마세요. 네네. 옆에서 아빠는 이 정도면 거저나 다름없다며 사버려 사버려 사버려하고 있고 남편은 내 눈치를 보면서도 아버님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신나 있고. 카드는 너갔고. 남편은 계약서를 손에 쥐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집에 와서 며칠이 지나니 제정신이 돌아온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나도 휴직 중이고 차 쓸 일도 없는데 굳이 살 필요가 있어?"


남편의 표정이 굳었다. 얼마나 신이 났던 지 회사 가서 동네방네 자랑을 한 직후였다. 차를 사야 하는 이유에는 안전이 있고 어쩌고 저쩌고 온갖 이유를 가져다 붙여대며 말 나올 때마다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 전에 회사에서 팀장님이랑 팀원이랑 같이 장례식장을 갔는데 굳이 내차를 타고 간다는 거야. 둘 다 키가 190인데 쪼꼬미에 셋이 꾸겨타고 갔어. 도착해서 팀장이 뒷좌석 문 열고 사람들한테 인사하는데 얼마나 민망하던지.

근데 조문 다 끝나고 나와서 다들 인사하고 헤어지는데 그때가 진짜 쪽팔렸어. 여자 후배가 차키를 누르니까 앞에 벤츠에서 삑 하고 소리가 나더라고. 갑자기 그 옆에 있는 쪼꼬미가 너무 부끄러워서 화장실 간다고 하고 조금 있다가 빠져나왔어.

얼마 전 팀 회식을 하며 선임팀장이 남편에게 물었다고 한다.


"차 계약한 거 언제나와? 이제 나올 때 되지 않았어?"


"아.. 사실 차 구입 와이프한테 반려되었어요."


"왜? 계약금 걸었다고 하지 않았어?"


"계약한 건 맞는데 전액 환불 가능하고.. 와이프가 집부터 사야 하니까 지금 차 못 사주겠대요.."


"집 있잖아. 근데 웬 집?"


"와이프가 가고 싶은 지역에 가고 싶은 아파트가 생겨서.. 그 집 사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못 산대요."


"(흥분해서)야 그래도 차는 사야지. 집 살 거 같으면 차 살 돈만큼 없어서 못 사겠냐. 설득을 잘해봐"


"(흥분한 남자후배) 맞아요. 선배님. 포기하지 마세요. 이제 경차 타실 때는 아니잖아요. 말 나왔을 때 사셔야 해요."


"(흥분한 팀장) 차는 사야죠. 사준다고 했다가 안사주고 그러면 안돼죠."


남편은 이번 주 일요일 MBA 골프 동아리에서 첫 필드 모임을 한다. 며칠 잠잠하더니 남편의 차 타령이 또 시작되었다.


"하늘색 스파크에서 골프채 낑낑거리면서 꺼내는 모습을 상상해봐. 어때? 가뜩이나 잘 치지도 못하는데 얼마나 없어 보일까"


"차 얘기 이미 끝난 거 아니었어? 빨리 환불해."


"(기죽어서) 알았어.. 하지만 난 포기 안 해.... 나 차 사주면 안 돼? 딱 한 번만 외제차 사줘. 응?"


남편을 불쌍하게 바라보던 아빠는 남편에게 말했다.


"너 골프 갈 때 그냥 내차 타고 가라. 일일 보험 들어놓을 테니까."


남편은 아니에요, 하고 몇 번 거절하더니 그럴까요? 하며 표정이 밝아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완벽한 부모가 된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