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외출을 했고 남편은 출근을 했다. 느적느적 밀린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했다. 소파에 앉아 한참을 까르를 안아주며 품 안에 재웠다. 내 숨 쉬는 박자에 맞춰 작은 생명은 눈을 꼭 감고 잠이 들었다. 잠시 잠깐 꼼지락 거릴 때마다 등을 쓸어 주었다.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주었다. 너에게서 느껴지는 체온. 너에게서 나는 향기.
까르가 눈을 떴다. 까만 눈동자는 나와 눈 맞춤을 하며 잠시 그대로 있다가 내 얼굴을 핥았다. 팔다리를 쭈욱 뻗치곤 내 품에서 벗어나 바닥에 서서 꼬리를 흔들었다.
"까르 잘 잤어?"
나는 한 톤을 높인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 대신 까르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닭다리 모양 인형을 물고 와 내 손위에 살며시 얹어놓았다. 이제 다 잤으니 놀아달라고. 귀여운 녀석.나는 까르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인형을 들고 약을 올리니 예쁜 목소리로 끙끙거리다가 앙 짖는다. 나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까르를 꼭 끌어안았다.
"엄마, 난 덜 놀았단 말이야."
버둥버둥 거리며 내 품에서 달아나 다시 인형을 물어와 앞에서 흔든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엄마의 온기가 그리운 오늘 같은 날. 까르를 돌보며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아닌데도 이렇게나 예쁜데, 나는 내 부모에게 얼마나 예뻤을까. 오래된 사진첩을 열어보고 싶어 져 식탁 의자를 밟고 수납장의 맨 위칸에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낡은 앨범들을 꺼냈다. 앨범을 열기 전에 감정적으로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물었다. 괜찮지는 않을 것 같지만 궁금했다. 사진 속에서 보고 싶은 건 어린 시절의 내가 아니었다. 내 나이의 엄마 아빠가 꼬마 아이를 키우는 모습들. 젊은 시절의 두 사람이 어땠는지 관심을 가진건 처음인 것 같다. 엄마 스물다섯 아빠 서른셋에 두 사람은 나를 낳았다. 결혼한 지 일 년 만이라고 했던가.
놀랍게도 엄마와 똑같이 생긴 나. 자세나 습관마저도 아빠를 닮은 내 동생. 사진 속의 두 아이는 대부분의 사진 속에서 부모님 중 한 사람에게 안겨있었다. 엄마는 내 동생 쪽을 아빠는 나를 선호했던 것 같다. 엄마가 항상 내 동생을 나보다 더 사랑한다고 느꼈었는데 사진이 새삼 그 확신을 더해주니 묘한 질투가 났다.
"네 동생한테는 너한테 보다 못해 준 게 많아서.."
사진을 보면서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세월이 흘러 미화된 아름다움이 아니라 있는 사실 그대로 내가 얼마나 사랑받고 자랐는지.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커왔는지. 이를 보이며 해맑게 웃고 있는 나와 그런 날 바라보는 내 부모님의 찐 밝은 웃음이 사진마다 가득해서 가슴이 벅찼다. 한 권만 보려다가 두권 세권 있는 사진첩을 죄다 꺼내 한 장씩 천천히 들여다봤다. 슬픔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밝은 가정에서, 아마 완벽한 가정이 있다면 우리 집이 그 표본일 거라고 믿을 만큼 행복했는데(사진 없이도 그 행복감이 기억이 나는데) 그로부터 몇십 년이 흐른 지금 우리 가족의 마음속에 상처로 남은 엄마의 사고가 가당키나 한가.
엄마는 더 나은 인생을 살았어야 했다. 학교에 다녀오면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물어주는 부모를 만났어야 했다. 엄마가 아빠와 이룬 가정 속에서 내게 준 모든 관심과 사랑, 기회들을 누릴 수 있었어야 했다. 똑같은 자세로 표정만 조금씩 다른 사진들을 찍어 사진첩에 곱게 꽂아놓은 그 사랑을 엄마도 응당 받았어야 했다. 모든 부모가 내 부모 같지는 않다는 것을 나는 몰랐지만 엄마는 알았다.
"넌 좋겠다. 나 같은 엄마 있어서. 난 나 같은 엄마 없었는데."
스무 살 무렵에는 엄마가 참 엉뚱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말을 내뱉는 엄마의 쓸쓸한 얼굴은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잊힌 적이 없다. 내게 흠결(가정환경)을 드러내지 않던 엄마였지만 그날 그 말은 너무 진심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아빠도 엄마도 부모형제자매가 다 있는 가정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성장환경은 나와 많이 달랐다. 아빠는 배운집의 차남으로 형에게 치여 지원을 많이 받지 못한 케이스. 인정받으려는 아빠의 욕구는 결혼 후 효자로 변신함으로써 엄마의 속을 썩였다. 엄마랑 대판 싸우고 홀연히 나갔다가(그래 봤자 동네 헬스장) 돌아오면 엄마는 닭을 다듬고 있었다.
"엄마, 지금 뭐 하는 거야?"
"너네 아빠가 아까 닭볶음탕 먹고 싶다고 해서."
"아니, 그래서 아빠가 먹고 싶다고 이걸 하는 거야?"
"(씩 웃으며) 그래 그러고 있네~ 너네 아빠 사랑받고 싶어서 저래. 아빠 올 때 다됐어 너 거실가 있어"
엄마는 아빠랑 싸우고 너네 아빠가 미친놈이니 어쩌니 해도 아빠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의 따뜻함이 있었기에 나 역시 연애를 할 때, 남자 친구였던 남편과 대판 싸우고 자리를 뜨더라도 정말 집에 가버리지 못하고 돌아가 안아주는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엄마의 경우는 워낙 개차반의 집구석에서 태어나 무능력한 아버지와 못 배운 어머니 틈바구니에서 장녀라는 이유로 공부한다고 하면 두들겨 맞고 돈 벌어오라고 쫓겨나고. 대학시절 할머니 할아버지 칼부림하며 싸우고 새까맣게 멍들어 우리 집으로 도망 나온 할머니를 보았을 때 엄마도 이렇게 맞았을까 심난했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내가 과외해서 번 돈을 쥐어주면 갑자기 우리 손녀딸, 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아빠는 엄마의 부모형제와 진즉에 연을 끊었다. 엄마에게도 그러기를 바랐지만 할머니가 씌어놓은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빠는 엄마 마음 편하라고 연 끊은 엄마의 자매가 사기죄로 복역을 할 때도 꼬박꼬박 월에 이십만 원씩 영치금을 넣어주었다.
아빠는 엄마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두 사람이 깨알 쏟아지게 사랑만 주고받는 부부는 아니었다해도 아빠는 엄마에게 무한 책임감을 보여줬고 엄마는 그런 아빠를 의지하고 보듬는 역할을 했다.
아빠는 <오로지 핏줄뿐이다>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 여기서 핏줄에 포함되는 범위는 우리 가족 오직 네 명뿐이었다. 아빠와 엄마는 나와 내 동생에게 집중적으로 최선의 환경을 제공했고 정서적으로 보호했다. 일단 아빠나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 당장 큰일도 별일 아닌 것이 되어 심신의 평화를 느꼈다. 어떻게든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아줄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이 있으니까. 경험이 일천하여 사회생활하는 도리를 몰라 헤멜 때도 이길 때와 질 때를 구별해 왜 그래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부모님이 있다는 것은 든든함 그 이상의 것이었다.
내가 아는 내 부모님은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두루두루 인품이 좋은 사람이었다. 서울대 나온 지식인도 아니고 수백억 대 자산가도 아니지만 나와 내 동생에게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운 사람이다. 모든 부모님이 내가 가진 부모님과 같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기에 내가 누리는 것을 당연히 알고 살아와서 미안하다.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엄마를 보내서 무척 속상하다. 사진첩을 보다가 두서없이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는데 오늘은 꼭 이런 마음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엄마가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내 마음이 이렇다고 알아줬으면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