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라면 말고는 끓여본 적도 없는데
#15. 아빠랑 반찬을 고르러 시장에 갔다.
엄마가 떠나고 한 달이 흘렀다. 어제 일처럼 생생한 그날로부터 나는 헤어 나오지 못했다.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한 달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르겠다.
기계적으로 일어나 아빠와 내가 먹을 아침 겸 점식식사를 준비한다. 그러고 나면 엄마의 유품들을 좀 정리하고 가끔 기분 내키면 산책을 한다. 매일 그렇게 아침과 저녁이 돌아오고 잠을 잔다.
냉장고 안에 가득하던 엄마의 반찬들은 맛이 있든 없든 상하기 전에 한 점이라도 더 먹으려고 끼니마다 꺼낸다. 어떤 건 너무 짜고 어떤 건 너무 오래된 거 같다. 그러나 엄마의 맛은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먹히든 안 먹히든 식탁에 앉아 꾸역꾸역 아빠와 둘이 밥을 먹는다.
아직도 장아찌나 무말랭이 같은 밑반찬은 많이 남아있다.
매일 같은 것을 먹다 보니 물리기도 하지만 그보다 큰일은 바닥을 보이는 반찬통을 볼 때마다 엄마의 부재가 더 아프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아빠도 마찬가지로 매번 배달 국에 같은 밑반찬으로 딸이 어설프게 차린 밥을 먹는 것이 괴로워 보인다.
차리는 나도 밥상 앞의 아빠도 그 자체로 어색하다. 엄만 나에게 주방 살림을 같이하자던 사람은 아니었다. 우린 같이 음식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엄마는 가끔 어떻게 만드는지 한번 보라고 밑반찬 몇 가지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며 부르곤 했다. 그러나, 내 안의 어린이는 엄마가 영원히 만들어줄 건데 하고 어리광 부리느라 "싫어, 엄마가 해줘" 하고 요리조리 빠져나기 바빴다. 엄마는 나의 그런 태도에 불만이었지만 대게는 "에휴, 저걸어째" 하며 그냥 받아주곤 했다.
아빠는 나와 함께 살기 시작한 이래로 한 달 만에 4kg이 빠졌다. 아빠는 웬만한 식당보다 엄마 밥이 더 맛있다고 했다. 집에서 밥이 맛있으니 밖에서 사 먹는 게 아깝다고. 나는 내 남편도 똑같은 레퍼토리, 밥 해달라고 부려먹으려는 립 서비스 아닌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렸다. 엄마는 이제 알았냐 이 순진한 것아, 하는 표정으로 날 보며 씩 웃었다. 우리 엄만 나를 무척이나 귀엽다는 듯 그런 웃음을 지을 때가 있는데 난 그게 싫지 않았다. 결혼 해 누군가의 아내가 되었으나 그 순간에는 그저 내가 엄마와 아빠 슬하의 딸로만 존재하는 듯 다시 아이가 되었다.
엄만 끼니때마다 굳이 집에서 밥 찾는 아빠 때문에 돌겠다면서도 또 굳이 열심히 끼니때마다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몇 년 전, 아침부터 집안이 좀 시끄러웠던 어느 날, 아빠랑 엄마가 어떤 이유에선가 싸우고 둘 다 잔뜩 화가 났다. 그런 채로 아빠가 외출을 했다. 그렇게 싸우고도 엄마가 부엌에서 점심시간 딱 맞춰 닭을 다듬고 있는 것을 보고 기가 막혔다.
"엄마는 속도 없지, 막 싸우고 나서도 이러고 있어?"
"그러게 말이다. 너네 아빠 닭볶음탕 먹고 싶다길래."
정성 담긴 음식을 수북이 준비해두곤 막상 싸웠던 아빠가 맛있게 잘 먹는 거 보면 행복하다고 했던 엄마였다. 그런 엄마를 알기에 아빠는 엄마가 가끔 실패작을 만들어도 열심히 먹었다고(남김없이). 엄마가 행복해 보이는 게 좋아서.
아빠랑 오늘은 둘이 일산시장에 다녀왔다. 국은 그런대로 배달 국이나마 조미료 안 들고 괜찮은 델 인터넷에서 찾아서 월식을 받아먹기로 했다. 물론 딱 두 사람 한 그릇씩 먹을 분량의 음식이 엄마의 음식에 비해 비루하고 감질나긴 하다. 하지만 재료를 다 사서 만드는 시간과 정성에 비해 내 요리 솜씨가 미안할 정도여서 업체 배송을 이용하는 편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끼니마다 그래도 새로운 국을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아빠나 나, 남편이 특별히 이견 없어 일단 이렇게 해 보기로 했다.
문제는 반찬이었다. 우리 집 냉장고 가득하던 맛있는 엄마의 반찬이 오래되어 꿉꿉한 냄새가 나는데 그나마도 얼마 남지 않아 바닥이 보이는 그 반찬통을 열 때마다 엄마가 죽었다는 것이 매일 실감이 났다. 밥상머리에서 속이 상해 밥맛이 떨어질 지경이라 엄마 반찬이 아니더라도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노란색 뚜껑의 타파 통에 반찬을 꽉꽉 채워놔야 내 마음의 구멍이 조금은 틀어막아질 것 같았다. 그런데 반찬을 어디서 사 먹어 봤어야지. 결혼하고 일산 떠난 지 한참만에 구일산 시장엘 가봤다.
아빠랑 시장에, 반찬사러
일산시장에 아빠, 엄마랑 같이 왔던 건 아마 고등학생 때가 마지막 기억이니 벌써 이십 년이 다된 일이었다. 지금도 오일장이나 이런 걸 서는지는 모르겠다. 장에 한 번씩 따라가면 엄마는 아빠가 좋아한다며 설탕 꽈배기를 사곤 했다. 손이 커서 한 열개 이렇게 많이씩 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애도 아니고 옷에 설탕 질질 다 흘리고 먹는다며 엄마가 아빨 구박하던 기억이 있다. 장에 따라나서는 일은 드문 일이었고 아마 집에서 빈둥이고 있는 나에게 엄마나 아빠가 "너도 갈래?" 해서 어쩌다보니 한 번 가거나 했을 것이다.
아빠와 오래된 재래시장에 다다라 골목골목을 누비며 반찬가게의 메뉴들을 보고 다녔다. 실은 반찬을 이렇게 파는 게 삼천 원이다 오천 원이다 하는데 어딘 많이 주고 어딘 적고, 국산인지 아닌지 등등 뭔가 잘 모르니까 그냥 보이는 가게마다 메인으로 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반찬을 서너 팩 정도씩 샀다. 우린 둘 다 뭔가 낯설었다. 엄마의 죽음으로 변한 환경 속에 적응해보겠다고, 결혼해서 벌써 6년 전 분가한 딸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결혼 전에 같이 살던 동네의 무려 <재래시장>에서 함께 장을 보고 있는 이 순간들이 낯설었다. 그새 늙은 아빠는 엄마에게 했을법한 상의를 나와하고, 나는 귀동냥 눈대중으로 대충 엄마 흉내를 내며 시장 물건을 들었다 놨다 고르고 있는 것이다.
아빠랑 재래시장에서 반찬을 사러 돌아다닐 줄 상상해 본적이 없다, 첫 번째로 반찬 부자였던 우리 집에 반찬이 없어 사러 다니는 상황을 상상한 적 없고 두 번째로 시장에서 쇼핑을 다닌다면 그건 아마 좀 더 늙은 엄마와 좀 더 늙은 나여야 했을 것이다. 오늘의 아빠와 내가 아니라.
아빠 또한 엄마와 오던 길과 골목을 딸과 거닐며 저 집 추어탕이 별로고, 저 집 갈비탕이 괜찮고 이런 얘기들을 나와 나누는 게 처음이었다.
저 집 추어탕과 갈비탕집을 엄마랑 갔었어, 그런데 엄마가 추어탕을 싫어해. 갈비탕은 먹을만 하다했어.
아빠가 엄마와의 추억이 떠올라 얘기를 하고는 싶은데
감정이 실리면 받아들이는 내가 힘들까봐 그냥 이런 식으로 흘려서 얘길한다는 것을 알아 서글펐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는 듯 모른체 했다. 간판을 새삼 정답게 살피며 언젠가 이 곳에 머물렀을 엄마를 떠올려봤는데 눈물이 자꾸만 나올 것 같아서 그마저도 그만뒀다.
나는 모르는 시간 속의 엄마와 아빠, 우리 가족이 함께한 세월 속에 구일산 거리가 있다. 탄현동에 살때였으니까. 그땐 우리 모두의 인생에 가장 청춘이었던 때였다. 좀 더 행복해 보이는 엄마가 있었고, 사회생활의 정점을 찍던 아빠가 있었다. 대학생이었던 나와 직장생활을 이제 시작했던 사회초년생의 내가 있었다. 장교의 길을 이제 막 걷기 시작한 남동생이 있었고 우리 모두 너무나 젊고 활기찼다. 그런데 조금은 더 나이 먹어서 돌아오니 모든 게 그 자리 그대로인 동네에서 우리의 역할과 입장이 달라져 있다는 게 씁쓸하고 버거웠다.
아빠는 은퇴했고, 엄마는 죽었다. 그리고 우린 각자의 가정을 책임지는 새로운 사회적 역할로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남편이 되어 세월의 흐름을 따라 많이 흘러온 셈이었다. 그 시간의 흐름을 우리 가족만 직격탄으로 맞은 것 같았다. 엄마의 죽음으로 인해서 갑자기 늙어버린 우리 모두의 새로운 변화들에 의해서.
"아빠 나는 살면서 내가 아빠랑 반찬 사러 다닐 줄 몰랐어"
"나는 알았겠냐. 평생 라면 말곤 끓여본 적도 없는데"
"엄마 해주던 거 생각하면 가게서 파는 거 양이 감질나"
"그지, 뭐 양 얼마 되지도 않는 거 막 팔천 원씩 한다"
아빠와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엄마, 아빠를 부탁한다며. 걱정하지 말아요.
매일 아빠와의 시간에 최선을 다하며 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