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줄이 뭐길래(3)

#34. 남보다 못한 핏줄도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가

by 풍선꽃언니

엄마가 죽고 나서 아빠는 엄마 얘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얘기한다 해도 엄마의 험담을 하며 정신 승리하는 게 전부다. 문득문득 좋았던 일들이 떠오를 때마다 괴롭기만 하니 나쁜 점만 기억하기로 했단다.

너네 엄마는 시간관념이 아주 없는 사람이었지. 나는 평생 항공정비를 했던 사람이야. 비행기 제시간에 정비해서 띄우는 일이다 보니 시간에 예민하다고. 너네 엄마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노상 사람 초조하게 하고. 그 집구석이 다 그래. 누가 해결해주겠지 뻗튕기면 되는 줄 알고 고집이나 부리고. 고집부리다 죽었잖아. 병신같이.

<시간관념이 없는 것>과 <고집부리다 죽었다>는 논리적으로 인과관계가 맞지 않다. 아빠는 엄마가 단점이 많았고 그로 인해 죽었다며 말도 안 되는 논리나마 가져다 붙여가며 상실의 아픔을 달래고 있다. 그렇지만 듣다 보면 서글프다. 부정하고 싶지만 아빠가 묘사하는 엄마의 모습이 틀리지 않아서다. 시간관념이 없거나 고집부리고 버티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그 집안 특유의 DNA가 분명 엄마에게도 있었다.


나는 고3 때 한국으로 돌아와 대입을 준비했다. 모 대기업 특채 전형이 있다는 대학이 있었다. 나는 일찌감치 대학보다 취업에 초점을 맞춰 삶을 설계했고 그날은 꼭 합격해야 하는 대입 수시 1차 면접이 있던 날이었다. 주유를 하고 나서 한 시간 거리 면접장으로 출발을 해야 하는데 멀쩡하던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날은 춥지 시동은 안 걸리지 대중교통으로 가기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아빠는 당황하여 출장 정비 연락하랴 보닛 열고 점검하랴 분주했다. 나는 면접은 물 건너갔구나 싶은 생각에 예상 질문지를 홱 덮어버리고 창밖만 바라봤다. 그때 엄마가 갑자기 라디오 볼륨을 높이더니 조수석에서 앞 창문 성에를 빙글빙글 닦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었다. 아빠와 나는 당장 뭐하는 짓이냐고 엄마에게 화를 냈다.

내가 어쩐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아빠나 내가 어쩌고 있든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이 만족할 만큼 깔끔하게 창문을 닦고 나서야 마른 수건을 내려놓았다. 기가 막혀서.

엄마라고 처음부터 그런 식이었을까마는 놀랍게도 엄마의 친정식구들은 어느 누구 한 사람 다를 바 없이 지레 체념이 빠르달까 위기의식이 없달까 문제 상황에서 회피형 대처로 일관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나마 엄마'라도' 움직일 때나 돼야 더딘 진행이나마 일이 처리가 되어갔다.



할아버지가 암으로 한 두해 고생을 하실 때 위장 이혼하고 얼마 없는 재산을 박박 긁어 혼자 살길 찾아 떠난 할머니. 비쩍 곯아 죽은 개똥이를 내다 버렸을 때처럼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버렸고 할아버진 얼마 못 있어 돌아가셨다.


뒷바라지하겠다고 반찬 만들어 나르며 내게 대리 간병 겸 간첩 역할을 것을 맡긴 엄마. 할머니를 집에 숨겨준 줄 알고 잔뜩 독 오른 할아버지가 칼 들고 숨어있을지 모르니 아파트 출입할 때마다 조심하라던 엄마.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할아버지가 오늘내일할 때도 돈 없다고 나자빠지는 엄마 형제자매 때문에 아빠만 붙들고 늘어지던 엄마를 기억한다.


IMF 터지고 외갓집 재산을 싹 말아먹은 외삼촌은 한 십오 년쯤 방구석에 처박혀 게임만 하던 폐인이 되었다. 할아버지 장례식 날에도 대기실에서 자빠져 잠만 자던 외삼촌 대신 상주가 된 아빠는 그날을 마지막으로 외갓집과는 일절 왕래하지 않았다. 그마만큼 한 것 또한 엄마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었던 아빠의 배려였을 것이다.


엄마에게 찾아와 형부 퇴직금으로 밑천을 대면 자기가 식당을 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거절했을 때 이모가 내 앞에서 엄마에게 짐승처럼 달려들어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모습을 보았을 땐 나 마저도 머리가 좀 컸을 때였다.

엄마, 난 엄마가 엄마 집을 끊어야 제대로 살 것 같아

그날로 나 역시 외갓집 식구들과 왕래를 끊었다. 엄마를 괴롭히는 것으로부터 엄마를 보호하고자 하는 딸의 마음을 누구도 욕할 수 없을 것이나 엄마는 그렇게 상처 받으면서도 내가 엄마의 가족을 존중하고 사랑하길 바랐다.


그렇게 십여 년이 지나 나와 남동생은 한 가정의 아내와 남편이 되어 분가했다. 외갓집 식구들과 특별히 엮일 일이 없다 보니 감정이 동요했던 과거의 일들도 기억 저편의 일이 되었다. 오직 엄마의 남편인 아빠만이 단절된 시간 속에서도 외갓집을 겪어냈다. 엄마 죽기 얼마 전까지 전과자 유부남과 장애인 형제 금품갈취 및 사기죄로 대전 교도소에 수감되어 영치금 요구하는 편지를 썼던 막내 이모에게 돈을 송금하며 지냈던 모양이었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남 보기에 좀 그래도 내 동생이야. 욕하지 마

엄마는 막내 이모 출소 후에 친정집 도보권 내에 원룸을 얻어주고 반찬을 챙겨줬다. 이모는 간경화를 앓았다. 병원에서 진료받고 돈이 없다고 엄마에게 호출하곤 했다. 그 무개념 한 행동에 식구들은 분노했다. 엄마는 아빠 눈치를 보면서도 병원비를 결제해주러 나갔다.


할머니가 엄말 지방 시골에 버린 얘기. 할아버지가 버스토큰을 훔친 얘기. 막내 이모가 성폭행을 당했는데 그걸 할머니가 오백만 원에 몰래 합의를 해주고 끝냈다는 얘기 시체 닦이 알바를 한다는 둥 하도 살벌한 구설이 가득한 사연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모르겠다. 부모님을 대신해 미안함만 가득하던 엄마는 그때마다 지갑을 열었으니 아마 돈을 노린 가짜 이야기였을 수도 있다는 게 가족들의 추정이었다.


난폭하고 구질한 옛날 얘기들을 한 번씩 떠 올리면 그게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문제는 항상 돈이었다. 변변한 직업을 가진 적 없는 집안의 가장(할아버지)이 일차적으로 가정경제에 대한 책임감이 없었기 때문일 것 때문이다. 그다음의 문제는 억척스럽게 생계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사람으로서 존엄을 잃은 할머니라고 생각한다. 각자 도생하던 엄마 밑의 형제자매에 대한 책임을 함부로 떠 안은 엄마는 바보였고 가진 게 없다 보니 생존만을 위해 진화한 동생들이 언니 몫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을 것도 백번 양보해 이해해 보려 한다. 내 평생에 뼛속 깊이 그들을 공감한 적은 없었지만 노력 중이다. 그래야 엄마가 덜 불쌍하게 느껴지니 살려면 노력은 의무다.


내가 정말 분노하는 것은 <무슨 일 생기면 엄마를 물고 늘어질 만큼 엄마가 그들의 든든한 그늘>이 었다면

엄마를 누나 대접 언니 대접은 하고 살았어야지.

작년 여름 엄마는 조현병(정신분열증)으로 많이 아팠다. 죽기 전에 그랬듯 그때도 잘 먹지 못했고 극심한 피해망상에 시달렸다. 아빠를 앞세워 경찰서에 찾아가 고소를 받아주지 않는 형사 앞에서 바닥에 뒹굴며 울부짖었다. 자신과 관련된 얘기를 도청 감청하여 방송 소재로 쓰는 MBC를 고소할 증거를 수집하겠다며 잠을 자지 않고 라디오를 들었다. 사위가 엔터테인먼트 사업분야에 있는 이유로 아는 PD가 있으면 (정확히 뭘 알아봐야 할지 모르겠지만) 뭔가 알아보라 부탁을 했고 내겐 예전에 알던 기자 지인 연락처를 내놓으라고 했다.


아빠는 엄마 강제입원을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계가족 동의가 필요했다. 아빠는 내게 먼저 전화했다. 반차를 내고 가야 할 때 나는 엄마의 정신병원 입원이 괴로워 망설였다. 나보다 강단 있던 남동생은 바로 달려가 아빠와 동행하여 의사를 만나고 서명하여 엄마를 병원에 넣었다.


엄마는 입원까지 '당한' 상황을 인정하지 못했다. 본인이 아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약을 주사하고 먹이는 의료진들에 대해 분노했고 의료행위를 일체 거부했다. 그들이 강제로 먹인 약은 자신의 기억을 좀 먹는다며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한 일기를 썼다. 가족들에게 매일 돌아가며 전화해서 빨리 꺼내 달라고 떼를 썼다. 가족들은 3주를 버텼다. 의사는 퇴원을 만류했지만 엄마의 일로 가장 상심이 컸던 아빠는 엄마의 절박한 요구에 못 이겨 퇴원 동의를 했고 휴가와 무급휴직을 최대한 활용해 엄마를 간병했다. 엄마는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늘 일하던 아빠가 엄마 곁에 꼭 붙어 싸우든 달래든 하고 있으니 엄마는 조금씩 아빠와의 생활 속에서 평온을 찾아가는 듯했다. 작년 8월의 일이다.


엄마가 퇴원하고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른 뒤에 제일 먼저 하고 싶어 했던 것은 엄마 식구들과 다 같이 모여 식사 한번 같이하는 것이었다. 엄마의 친정 식구들은 서로 껄끄러우니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만남을 피했다. 식사 한 번을 그토록 원하니 아빠는 엄마가 그토록 원하니 딱 한 번만 자리를 만들어 보자며 우리를 설득했다. 나는 사촌동생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뭐 모르는 동생들은 그들의 부모에게 얘기를 꺼냈으나 반응이 별로였는지 안될 것 같다는 통보를 해왔다. 나는 엄마에게 그 소식을 전하기가 미안해 차일피일 알리기를 미뤘다. 기다리던 아빠가 진행상황을 굳이 물었을 때 판이 안될 거 같다 귀띔했다. 옆에서 듣던 엄마의 쓸쓸한 낯빛이 슬펐다.


엄마가 죽고 장례식장에 달려온 외갓집 식구들이 법석을 떨며 물었다. 엄마 왜 그런 거냐고. 어디가 아팠었냐고. 기가 막혔다. 우리 앞에서는 그토록 병색이 가득해 피해망상에 지배되어 할 소리 못 할 소리 다해놓고는 정작 엄마 식구들한텐 아픈 내색 한번 안 했다는 게 화가 났고 이제 와서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은지 내게 악다구니 쓰며 묻는 그 집안 식구들이 파렴치하게 느껴졌다.

얼마 전에 엄마 목소리가 좀 안 좋아서 병원 가보라고 하긴 했는데..

한번 와보지. 어디가 아프냐고 묻기라도 해 보지. 자기 식당에서 밥 먹을 때도 엄마 상대로 장사하던 큰 이모나 자기 아프다고 병원비 필요할 때 전화질이나 하던 막내 이모.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나는 그 입들을 찢어버리는 상상을 하며 그들을 영혼 없는 눈으로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엄마에게 친정을 끊어야 엄마가 산다고 말할 때마다 엄만 나에게 그래도 혈연이라는 게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혈연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런 집안에서 태어난 것도 엄마의 운명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엄마는 그들의 엄마로 선택된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실질적인 왕래를 하지 않고도 각자 도생 하며 잘 살고 있었다. 서로에게 민폐가 될 뿐이니 안 보고 사는 게 현명한 것이 었다고 생각한다. 엄마도 선택을 했어야 했다. 언젠가 좋았던 한 때를 추억하며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하기보다 엄마가 가진 것에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편이 더 좋았을 텐데 엄마의 욕심이 엄말 죽음에 이르게 까지 했다. 엄마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빠도. 나도. 남동생도. 우리가 일군 안락하고 건실한 환경도 아무 힘이 없었다. 그래서 시간을 돌린대도 엄마를 구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쉽지만.


장례식이 끝나고 외삼촌은 다 정리되면 같이 모여 식사 한번 하자며 숙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는 기회 되면 언제 한번 자리를 마련해 보마 말했다.

늦었어. 삼촌

우리 가족은 누가 말할 것도 없이 각자 외갓집 식구들의 연락처를 한 명 한 명 꾹 눌러 차단을 했다. 우린 그런 핏줄 원치 않으니까.


우리의 선택은 엄마와 달랐다. 우리만의 삶 속에서 엄마는 우리와 영원할 것이고 그들은 엄마를 완전히 잃었다.

매거진의 이전글핏줄이 뭐길래(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