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고 사는 일만 아니면 다 괜찮아

#54. 내 인생의 방향 재설정의 시간

by 풍선꽃언니

<사람이 죽고 사는 일만 아니면 다 괜찮다>는 말.


삶의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든 죽는 거만 아니면 괜찮다고 하는 사람을 살면서 딱 한 명 만나봤다. 그녀의 어머니는 꽤 유명한 연예인이었는데 폐암으로 그녀가 스무 살 무렵 사망했다고 한다. 그 딸이 내 직장동료임을 알렸을 때 엄만 옛날에 그 연예인의 팬이었다며 비극적인 일을 겪은 그녀에게 밥 한 끼 따끈하게 해주고 싶다고 집에 초대하라고 했었다. 화려한 그녀의 삶 속에서 묘한 쓸쓸함이 느껴져 자유로움으로 가득한 그녀의 삶을 동경하면서도 동정하곤 했다. 지금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만 아니면 다 괜찮다>는 말은 상실로 인한 극단적 상처를 받아 본 사람만이 토해 낼 수 있는 신념인 것 같다. 죽음 앞의 절박함을 경험해보지 못하고 흔히들 하는 <아이고 죽겠네><늙으면 죽어야지> 말 뿐인 죽음 말고 <진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온 몸의 고혈이 짜내어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 쳐본 사람만 가슴으로 이해되는 신념. 비교적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고 <죽는 게 아니라면 다 괜찮다> 외치던 그녀에겐 경험에서 얻은 그 신념이 있었다. 그렇기에 꿋꿋이 자신의 속도로 인생을 달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엄마가 죽고 오늘로 꽉 채워 두 달이 지났다. 절대 못 견딜 거 같은 시간도 흐른다는 것을 알았다. 집 거실에서 아빠는 라디오로 음악을 들으며 내가 타 준 냉커피를 마시고 있다. 남동생은 전일 야근하고 집에 잠시 들러 홍삼을 두고 갔다. 지금쯤 집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오랜 친구와 만나서 맛있는 오리고기를 먹었다. 우연히 들어간 카페는 남동생 상견례 때 왔던 곳으로 그때는 있던 엄마가 지금은 없는데 나는 울지 않았다. 남편은 집에서 친정식구들과 내가 구워둔 크루아상을 먹고 MBA 동기 모임을 나갔다.

남동생의 상견례 뒷풀이를 했던 cafe. 화단의 꽃이 근사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죽을 것 같은 고통은 지나가고, 죽음엔 유예나 연기가 없다>는 것이다. 죽겠다고 엄살 피울 시간에 그냥 죽을 만큼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죽을 만큼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으며 죽을 때 죽는 건 어쩔 수 없으니 일단 오늘은 오늘만 잘 살면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는 것이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에 갇혀 살았다. 또 할 거면 잘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막상 엄마가 죽고 나니 모든 게 허무한 가운데 내 세상에 의미 있던 것들이 보잘 것 없게 느껴졌다. 엄마의 죽음을 겪으며, 죽음 앞에 더 중한 것이나 귀한 것은 없다는 걸 배웠다.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은 슬픔과 기쁨의 연속으로 채워가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어차피 한번 살다 죽을 인생이라면 조금이라도 내게 기쁨을 주는 것이 비록 경제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일이라 해도 한번 해보기로 마음을 바꿨다.


올 6월 초에 가을학기 <통번역 대학원> 지원하기

내가 지원하려는 학교 입시요강. 지원기간이 얼마 안 남았다.


올해 남은 기간 동안 내게 필요하고 좋아하는 일들을 차분히 해 나가 보기로 결심했다. 특히, 통번역대학원을 다녀보고 싶었는데 주말을 이용해서 다닐 수 있는 과정을 찾았고 아빠와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어 힘이 난다.


나는 잘 살 것이다. 엄마가 비록 이 세상엔 없지만 나를 내려다볼 수 있는 그곳에서 나를 바라보며 잘 사는 내가 대견하고 사랑스럽게, 정말 잘 살 것이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빠가 있고, 날 많이 생각해주는 동생이 있다. 힘들 때 같이 어울릴 친구가 있고 탄탄한 직장이 있다. 부족하지는 않을 만큼 돈도 있고 뭔가 해 보고 싶은 의지와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가지고 있다. 엄마만 없지. 엄마가 없는 게 크지. 그렇지만 엄마가 내게 주고 간 내면의 힘은 내 삶의 핏줄을 뜨겁게 흐를 것이고 나는 일어설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내가 사랑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사람이 죽고 사는 일만 아니면 다 괜찮아.




매거진의 이전글망자들의 전원주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