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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즈 Feb 07. 2022

젝키와 그리고 이름 모를 언니와


중학교 3학년, 과학 실험실에서의 일이었다. 그 시절 우리 담임은 과학 선생님이었는데, 그래서 우리 반 아이들은 돌아가며 실험실을 청소해야 했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날이었다. 봉걸레를 들고 과학실에 들어섰고 빨리 집에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걸레질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나는 노랑색이 좋아!”라고 외치며, 한 손에 노랑색 풍선을 들고 흥겹게 흔들던 언니를 마주쳤다. 언니는 과학실 보조선생님과 절친이었던 컴퓨터 보조선생님이었다.


이건 그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이라면, 어떤 팬덤에 한 번쯤은 속해 있어 봤던 사람이라면, 단번에 눈치챌 수 있는 일종의 ‘신호’였던 것이다.


“어...? 혹시 젝키팬이세요?”


‘노랑색’이라는 단어가 주는 정말 아주 하찮은 실마리는 우리를 하나로 엮이게 했고, 그렇게 그 시절 우리는 알 수 없는 시절인연이 되었다. 언니 역시 그 시절 해체한 젝키의 팬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시절 나는 16살 소녀였고, 언니는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으니 적어도 23살쯤은 됐을 것이다. 왜인지 그때 당시 나이 많은 언니와 친구를 하게 된 건 처음이기도 하였거니와, 나이 차 많이 나는 언니에게 나이를 묻는 것은 왠지 금기시되는 상황 같아서, 언니의 나이를 묻지 못했다. 그냥 나와 언니는 10대와 20대가 주는 그 거리감 정도만큼의 나이차이가 있을 거라는 짐작만 했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젝키를 통해 언니와 친구가 되었다.


그 시절의 언니는 내가 알지 못하는 젝키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언니가 경험했던 현장일화와, 진짜인지 가짜인지 소설인지 알 수 없는 젝키의 비화와, 젝키가 해체하던 2000년 5월 18일의 드림콘서트를.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어 젝키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슬퍼했고, 솔로 활동을 시작한 오빠들이 기죽지 않아야 한다며 열심히 팬클럽 활동을 하였으며, 간간히 아주 짧은 지면을 차지하며 발행된 잡지를 공유하며 ‘왜 우리 오빠 페이지가 겨우 4페이지밖에 되지 않느냐’며 분노했다. 음원 차트에 1위 한 번 하지 못하는 오빠들의 솔로 활동에 분개하기도 하였지만, 그럼에도 그 시절에는 오빠들이 해체하고 활동할 수 있음에 서로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갔고, 언니는 그 중학교에 여전히 남아서 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연락을 끊지 않고 계속해서 인연을 이어갔다. 그 시절 우리를 연결 짓는 수단은 네이트온과 막 활성화된 핸드폰 문자였다. 덕분에 언니와 나는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 언젠가 언니와 나는 어떤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또 다시 같은 가수를 좋아하게 되었다. 필라델피아 출신의, 한국말이 서투르지만, 그래서 순수한 맛이 있었던 ‘팀’이라는 가수였다. 언젠가는 팀이 대전에 팬 사인회를 하러 왔었는데, 그때 언니와 같이 동행도 했었다. 나는 그 시절 순수한 마음으로 팀에게 선물이 너무나도 해주고 싶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조악한 만들기 수준이었는데, 아빠에게 만들기 숙제가 있다고 ‘구라’를 쳐서 받아낸 2,000원으로 하드보드지와 색지 그리고 아스테이지를 사서 팀의 1집 앨범에 들어있는 모든 전 곡의 제목을 플랜카드로 만들어 선물을 했다. 팀은 ‘고맙다’며 웃고 있었지만, 아마도 가는 길에 버렸겠지.


언니와의 마지막 만남은, 이 기억이 맞는다면 아마도 수능이 끝난 직후였던 것 같다. 수능이 끝난 나에게 언니는 그 시절 은행동에서 가장 맛있다는 스파게티를 사주었다. 스파게티를 맛있게 먹었고, 우리의 오빠를 이야기하고, 앞날을 이야기 하며, 그렇게 헤어졌던 것 같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언니를 잊고 지냈다. 그렇게 어떻게 된 일인지 언니와의 연락은 어느 순간 끊기고 말았다.


나는 살아오며 무엇이 나쁘고 좋은 지를 구분할 수 있는, 꽤나 현명한 사람이 되었다(아마도). 그런 덕분인지 나는 그 시절의 추억을 비빌 언덕으로 삼아 오빠들이 저지르는 만행을 눈 감고 용서해주지는 못하겠다. 가끔 ‘HOT냐 젝키냐’ 하는 21세기의 논쟁이 벌어질 때면 ‘내가 바로 젝키팬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할 정도로, 나는 당최 이 오빠들이 저지르는 알 수 없는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다.


몇 해 전 젝키가 무한도전에 나오며 그 시절의 추억을 꺼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내가 그 시절에는 그랬지’ 하며 순간을 떠올리고는 했지만 예전만큼 그들이 좋지는 않았다. 덕분에 그 시절에 열심히 세뱃돈과 용돈을 모아 구매했던 오빠들의 앨범은 ‘무한도전 코인’을 맞고,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젝키에서부터, 은지원, 강성훈, 제이워크, 이재진까지, 아주 골고루.


언니는 아직도 강성훈의 살인미소를 보며 웃음 짓고 있을까. 나는 강성훈의 살인미소가 그다지 순수하지 않다는 걸 아는 어른이 되었다. 언니는 여전히 덕질을 즐기고 있을까. 나는 요즘 조성진을 덕질 하고 있는데.


환상 속의 그대는 내가 머리가 커지며 환상을 산산이 부숴버렸지만, 그런 떨림이 있었기에 내가 자랄 수 있었다는 사실에는 부정할 수 없다.


나의 성장 7할에는 젝키가 있었다. 비록 오빠들의 노래를 찾아 듣는 일은 적어졌지만, 아직 2022년에도 ‘기억해줄래’를 듣고 있다. 그것은 해체하는 날, 젝키가 부른 마지막 곡이었다.


‘기억해 줄 수 있니 우리 서로 사랑한 것을’


확답은 할 수 없지만, 기억은 오래도록 추억을 버팀목 삼아 자라날 것이라는 것을, ‘짬’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추억은 서슬퍼렇게 36살 내 곁에 머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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