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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해당 이종헌 Apr 14. 2018

노예처럼 굴어라

이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독서당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 적막하고 쓸쓸하기가 마치 귀신의 집을 방불케 하였다.


어느 날 어우(於于) 선생이 술병을 들고 찾아와 위로하기를

"그대의 분하고 슬픈 마음을 내 어찌 모르겠소?

이 술 한 잔 먹은 후 내 말 들어보오."

하며 조롱박 술잔 가득 술을 따라주었다.

"옛날 서울 장안에

김 모라는 한량이 있었는데

장안 화류계를 주름잡아 한 번이라도 그를 만난 기생은

평생토록 흠모하여 칭송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오.

어느 날 장안의 명기(名妓)들이 모여

각자 흠모하는 이를 모시고 잔치를 열기로 하고

약속한 날에 남산 상산대(上山臺)에 휘장을 치고 기다리니

화려한 의복과 수려한 용모의 젊은 한량이 십여 명 이르렀을 뿐

나머지 기생들은 짝이 없이 소나무 숲 아래쪽을 엿보고 있었다오.

이윽고 해가 서산에 기울 무렵

남루한 의복의 사내 하나가 느릿느릿 걸어 올라오자

오십 여명의 기생들이 다투어 금잔에 술을 부어 올리니

젊은 한량들은 소변을 핑계대고 모두 달아나고 말았다오.

이로부터 장안의 한량들이 연회에 이름난 기생을 부르고자 할 때는

한결같이 김 모를 초청하여 참석케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장안의 명기들이 다투어 몰려들곤 했답니다.

이는 사인소나 장악원, 예조의 힘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김 모가 죽을 때

여러 한량들이 그 비법을 배우기를 청하자

좌우 식솔들을 물리친 후 나지막한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하오.

노예처럼 굴어라!

아! 어찌 한량들에게만 소용되는 비법이겠소?

이른바 명사(名士)가 되기 위해서도 이 같은 처세가 필요한 것이지요."

하며 서로 술잔을 주고받다가 쓰러져 잠이 들었다.


이생이 깨어보니 선생은 간 곳이 없고 빈 술병만 어지러이 나뒹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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