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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해당 이종헌 Nov 19. 2017

석재 윤행임의 북한기 3

현해당의 북한산 이야기 17

태고사 원증국사탑. 원증국사 탑비와 동시대인 고려 우왕 11년(1385)에 세워진 것이다.
[역문]산영루에서 이십여 보를 지난 곳에 언룡교가 있고, 다시 1리쯤 지난 곳에 창고와 절이 있는데 모두 이름을 중흥(重興)이라고 한다. 뒤쪽에 치영(緇營)이 있으며, 총섭이 거주한다. 동쪽 높은 언덕에 사서삼경 판본이 있는데, 누각을 지어 덮었다. 조금 남쪽에 「고려국 대종사 시 원증 탑명」이 있다. 동쪽으로 꺾어 곧장 올라가면 3리쯤에 용암봉이 있고 그 아래 절이 있으니 곧 용암사다. 연못이 두 개 있는데 큰 물고기가 많다. 용암봉에서 성을 따라 남쪽으로 1리쯤 되는 곳에 동장대가 있다. 앞으로 광활한 들판을 마주하고 있으며 가까운 곳의 나무와 먼 곳의 집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노원(蘆原)의 여러 산들이 발아래 있으니 손으로 어루만질 수 있을 것 같다. 동장대 아래 삼십여 보쯤에 봉성암이 있다. 다시 성을 따라 남쪽으로 1리쯤 되는 곳에 문이 있으니 이름하여 대동문이다. 서쪽 아래로 1리쯤에 연무정(鍊武亭)이 있고 대로를 따라 삼십여 보를 내려가면 관성장영이 나온다. 관성장영에서 삼십 보를 지난 곳에 호조 별고가 있고 또 십여 보쯤에 행궁이 있다. 다시 대로를 따라 2리쯤 가면 동쪽에 보국사가 있고 또 십여 보쯤에 큰 연못이 있으며 십여 보를 더 가면 금위영 유영이 있다. 금위영 유영 남쪽 암석에 창영 연기(緣起)를 새겼는데 도제조 이이명이 지은 것이다. 유영 맞은편 절벽에 ‘금위영’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누구의 글씨인지 알 수 없다. 다시 남쪽으로 꺾어져 오십여 보 지점에 보광사가 있고, 또 삼십여 보쯤에 어영 유영이 있으며 다시 남쪽으로 1리쯤을 올라가면 문수암이 있다. 암자 앞에 연못이 있고 돌부처를 석사자 위에 앉혔는데 부리부리한 눈과 볼록한 배가 흡사 산 사람처럼 생동감이 느껴진다. 위쪽에 암문이 있고 그 근처에 남장대가 있으며, 성을 따라 1리쯤 되는 곳에 대남문이 있다.         
[원문]過二十餘步。爲偃龍橋。過里許。有倉有寺。悉名重興。後爲緇營。捴攝居之。東有懸厓。有七書板本, 閣以覆之。少南有高麗國大宗師謚圓證墖銘。東折直上。殆三里龍巖峰。峰下之寺曰龍巖。有二池。池多脩鱗。自龍巖循城而南一里許。爲東將臺。前臨曠野。近樹遠店。点綴如畫。蘆原諸山在下風。而手可以撫。㙜下三十餘步。有奉聖庵。又循城而南一里許。而門曰大東。西下一里。有鍊武亭。從大路下三十餘步。爲管城將營。過營三十步而戶曹建別庫。又十餘步而行宮。又從大路二里東而輔國寺。又十餘步而有大池。又十餘步而禁衛留營。營之南巖石。刻刱營緣起。都提擧李公頤命製。對營絶壁。刻禁衛營三字。不知誰人筆。又折南五十餘步。有普光寺。又三十餘步而御營留營。又南上一里許文殊庵。庵前有池。石佛坐石獅上。睅眼皤腹。蔚有生動意。上有暗門。傍有南將臺。循城過一里許。而門曰大南。
[해설]◎『북한지』에 언룡교는 중흥사 동구에 있으며, 승 성능이 그 위에 2층으로 된 누각[항해루]을 세웠다고 하였다. ◎『북한지』에 중흥사는 등안봉 아래 있으며 옛 절은 다만 30여 간에 불과하였으나 축성 후에 136간으로 늘려지었다고 하였다. 서울 봉은사 소장의 「중흥사 향로(重興寺香爐)」에 원(元) 순제(順帝) 지정(至正) 4년(1344)이라는 명문이 있어 중흥사가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치영(緇營)은 북한산성 내 승병들을 지휘하는 일종의 지휘본부이다. 승병들의 우두머리인 총섭이 거주한다. ◎ 북한산성에는 각종 서적의 책판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정확한 시기는 판별하기 어렵지만 조선 후기 어느 시점에 산성 내 태고사를 비롯한 11개의 사찰에 판본이 소장된 것이 조사된 바 있다. 한국학 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북한 태고사 소재 책판 구별 여 십일사 장전 편전 통아 세진 성책(北漢太古寺所在冊板區別與十一寺長箭片箭筒兒洗塵成冊)」에 따르면, 소장되었던 책판 목록은 약 6천 종에 달한다. [북한산성의 역사와 문화유적(경기문화재단)에서 발췌] ◎「고려국대종사시원증 탑명」은 고려 말기인 1385년에 건립되었으며, 1977년에 보물 제611호로 지정되었다. 탑비에는 고려 말기 명승 원증국사의 출생에서부터 입적에 이르는 내력이 적혀있는데, 이색(李穡)이 비문을 지었으며 권주(權鑄)가 그 내용을 새겼다. [북한산성의 역사와 문화유적(경기문화재단)에서 인용] ◎노원(蘆原)은 지금의 서울 노원구 일대에 해당하는 넓은 평야지대를 말한다. 말을 방목하여 기르는 곳으로 우리말 이름은 마들평이다. ◎관성장영은 행궁 앞에 있는 관성소를 말하며 북한산성 내의 군사와 재정을 실질적으로 주관하는 관성장이 거주하는 곳으로 관성장 예하에 약 1,106명이 배속되어 산성내 군량의 관리 및 수비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관성소는 경리청 상창 내에 있었는데 경리청 상창은 행궁의 오른쪽에, 호조창은 행궁의 왼쪽에 위치했다. 경리청 상창은 가장 큰 규모로 63칸의 양곡 창고 외에 내아 12칸, 집사청 3칸, 군관청 4칸, 서원청 4칸 등 성안 사무를 총괄할 수 있는 관성소를 함께 두었으며 행궁을 관리하는 관성장이 근무하던 곳이다. ◎호조 별고는 호조창을 말한다. 『북한지』에 호조창은 행궁 앞에 있으며 어공미(御供米)를 저장하는 곳이라 하였다. ◎『북한지』에 보국사는 금위영 아래 있으며 177간으로 승 탁심, 명희 등이 창건했다고 하였다. ◎창영 연기란 「북한산성 금위영 이건기(北漢山城禁衛營移建記」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금위영의 축성 구간과 성문, 초루, 방옥, 성랑, 장대, 사찰 등의 시설물 소개, 금위영 유영의 이건 사유, 이건 후 규모 등이 언급되어 있다. 이 이건기를 유영 남쪽 암석에 새긴 것이 곧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87호 「금위영이건기비」이다. 금위영 유영은 본래 90 간이었으나 을미년(1715년) 3월, 보국사 아래로 이건 하면서 145간으로 확장되었다. ◎ 『북한지』에 보광사는 대성문 아래 있으며 71간으로 승 설휘가 창건했다고 하였다. ◎어영청 유영은 현재의 대성암 자리에 있었으며, 『만기요람』(1808)에  대청 18간, 내아 7간, 향미고 48간, 군기고 10간, 중군소 4간, 서원청 2간, 월랑 12간으로 기록되어 있다. ◎ 『북한지』에 문수봉 아래 문수굴이 있는데 굴 안에 감천(甘泉)이 있고 돌로 만든 문수보살상과 오백나한상이 있다고 하였다. ◎문수암 위쪽의 암문은 오늘날의 청수동 암문이다. ◎대남문은 본래 암문, 또는 소남문, 문수문 등으로 불렸으나 1760년 대성문이 영구 폐쇄되면서 대남문으로 격상되었다.      
[역문]성중의 괴석(怪石)은 그 수가 만을 헤아리는데 산골짜기 여기저기 흩어져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마치 이무기가 용틀임을 하는 것 같고, 매가 먹이를 낚아채는 것 같고,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고, 양들이 흩어져 있는 것 같고, 개가 짖고 돼지가 달아나는 것 같고, 사람이 서 있는 것 같고, 스님이 읍(揖)하는 것 같고, 담무갈 같고, 부도 같고, 배 같고, 발우 같고, 붓과 벼루 같고 거북이 꼬리를 끄는 것 같고, 기기화류[천리마]가 고삐를 벗어던지는 것 같고, 사자가 산천을 달리는 것 같고,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 같고, 새가 나는 것 같다. 종종 기이하게 생긴 전나무의 어린 꽃이 거꾸로 매달려 하늘을 가리고 알록달록한 무늬의 이끼와 길게 뻗은 덩굴 사이로 다람쥐와 족제비가 어지럽게 뛰어다니는데 갑자기 나타난 인기척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다. 시냇물 또한 사방에서 흐르니 혹은 곧장 떨어지고, 혹은 나는 듯 흐르며, 혹은 천천히 완만하게 흐르며, 혹은 빠르게 흘러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또 어떤 것은 구불구불 흐르다 고이며, 어떤 것은 격렬하게 소리를 내며 흐르고, 어떤 것은 빙빙 돌다 못을 이루고, 어떤 것은 기세가 꺾여 얕아지니 일일이 다 헤아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문득 돌을 만나면 소리를 내니 만약 이곳의 주먹만 한 돌멩이 하나를 한양 땅에 가져다 놓으면 너나없이 달려들어 즐겨 감상할 것이다. 승려는 매일처럼 보고 듣는 경치에 식상해서 그런지 서암사와 상운사 외에는 볼 것이 없다고 한다. 인가는 모두 바위에 의지하고 물에 임하여 있으니 그 맑고 깨끗함이 가히 사랑스럽다. 다만 땅이 협소하여 여러 집이 함께 모여 살기 어려운 것이 마치 굴 딱지가 바위에 붙어 있는 것 같으니 몇 리를 지나는 동안 마주친 집은 겨우 서너 채뿐이다. 주민들은 철쭉나무를 꺾어 지팡이를 만들며 높고 낮은 물과 언덕을 평지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내가 곡식 옮기는 일로 인하여 가서 유람하였다.     
[원문]捴一城中石之數。以萬計。谺嵌縱恣險恠。如龍挐, 如鷹攫。如乕豹之蹲。如散羊。如犬嘷而豚奔。如人立。如僧尼之叉揖。如曇無竭。如浮屠。如舟如盂。如筆硏。如曳尾之龜。如騏騮之脫馽。如狻猊之奔川。如魚之泳, 鳥之厲。種種怪杉穉花倒垂縫隙。班紋之苔。走蔓之藤。長毛之鼪鼯。縱橫交錯。人直過之。無不駭愕睢盱。泉亦百道。或倒瀉, 或飛流。或徐而緩。或駛且直而不少逗。或曲而爲渟。或激而吼。或抱而回而淵。或迂而淸淺。固不可名數。然輒待石而鳴。若使此一拳石置之漢之陽。必爭輦致。以供玩賞。僧乃慣於見聞。除西巖祥雲。輒稱不足觀。人家悉依巖臨水。蕭灑可愛。但地窄不能團聚。如蠣牡之附巖。數里僅逢四三家。居人取躑躅爲筇。上下川原若平地。余因移粟往遊。
[해설] ◎담무갈 보살(曇無竭普薩)은 법기 보살이라고도 하며, 『화엄경』에 의하면 금강산에 머물면서 12,000의 보살을 거느리고 설법을 한다고 한다. 불교의 주요 경전인 『화엄경』에 근거를 둔 담무갈 보살 설화는 담무갈 보살 신앙 또는 금강산 신앙으로 발전하였고, 특히 원 간섭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담무갈(曇無竭)은 산스크리트어 ‘다르모가타(Dharmogata)’의 음역으로, 법(法)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따라서 담무갈 보살은 법기 보살(法起菩薩)의 음역이다. 금강산의 명칭은 『육십화엄경』보다 조금 후대의 경전으로 695~704년 실차난타가 번역한 『팔십화엄경(八十華嚴經)』에 등장하는데, "바다 가운데에 금강산이 있는데 옛적부터 보살들이 그곳에 머물렀다. 지금은 법기 보살이 거처하며 12,000여 권속(眷屬)과 함께 머물며 항상 설법을 한다."라고 하였다. [장달수의 한국학 카체에서 인용] ◎ 1785년 작성된 북한산성 안찰어사 신기(申耆)의 서계(書啓)에 따르면 성에 거주하는 백성의 수가 그전에 5백 호였던 것이 2백 호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문수사. 고려 예종 4년, 탄연이 창건하였으며, 문수굴 안에 돌로 조성한 문수보살, 옥으로 조성한 지장보살, 금으로 도금한 관음보살이 있어 삼성굴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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