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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해당 이종헌 Nov 22. 2017

도성암을 찾아서1

현해당의 북한산 이야기 24

 토요일 아침, 정적을 깨는 전화벨 소리에 상욱은 가까스로 눈을 떴다. 벌써 8시가 넘은 시각, 상욱은 문득 나쯔코와의 약속을 생각하고는 머리맡에 놓아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다소 상기된 듯한 나쯔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까지 자고 있는 거 맞죠? 전화 안 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잖아요. 난 벌써 공항에 도착했어요!”


상욱은 문득 오래전에 헤어진 연희와 딸 주니가 생각나 머뭇거려졌으나 곧 배낭을 챙겨 집을 나섰다. 간밤에 비가 내렸는지 보도에는 물기를 잔뜩 머금은 낙엽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청량하다고 해야 할지, 처량하다고 해야 할지? 겨울 초입의 풍경은 꼭 늙은 당나귀처럼 볼품이 없다. 상욱은 일부러 낙엽을 피해 걸으며, 늦어도 열 시 까지는 수유역 3번 출구에 도착해야 한다고 몇 번씩 다짐을 받던 나쯔코의 목소리가 생각나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상욱은 나쯔코를 한 달 전에 있었던 북한산 문학 포럼에서 처음 만났다. 일본 교토대학 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그녀는 영국인 아처와 함께 인수봉 초등자로 알려진 임무(林茂)에 관한 자료 조사차 서울에 왔다가 강 교수의 소개로 포럼에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그날 포럼의 주제는 최근 일본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삼각산 도성암의 옛터 찾기에 관한 것이었는데, 나쯔코는 무엇보다 상욱의 주제 발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포럼이 끝나고 강 교수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뒤풀이 자리에서도 나쯔코는 계속 상욱의 옆 자리에 머물며 이런저런 질문 공세를 펼쳤다. 나이 서른다섯에 세 살짜리 딸 하나를 둔 싱글 맘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한국의 K대학에서 <성능의 북한지(北漢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강 교수와는 교토에서 열린 북한산 28봉 그림 전시회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다. 또, 최근 일본에서 불고 있는 도성암 연구 열풍을 소개하면서는 상욱의 시 <도성암>을 직접 낭송해 보이기도 했다. 그 밖에도 강 교수보다 다섯 살 아래인데 친구처럼 지내니 상욱과도 친구처럼 지냈으면 좋겠다는 둥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쉼 없이 늘어놓았다. 그런 나쯔코를 처음 봤을 때 상욱은 저도 모르게 오래전에 헤어진 연희와 딸 주니를 생각했었다.


상욱은 지하철 승강장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갑자기 생각이 난 듯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여러 번의 신호음 끝에 아직 잠이 덜 깬 듯한 강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까지 한밤중이군! 나쯔코한테 잔소리 듣기 싫으면 빨리빨리 준비하고 나오라구!”


  “안 그래도 지금 막 전화받았어. 둘이서 오붓하게 다녀오면 될 걸, 왜 나까지 끌어들여가지고 귀찮게 해...”


비록 툴툴거리는 해도 그리 싫지만은 않은 기색이었다. 토요일 아침이라서 그런지 지하철은 한산하였다. 상욱은 출입문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지난달 포럼에서 발표했던 도성암 관련 자료들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도성암은 서기 1459년(세조 5년), 세종의 부마인 양효공과 정의공주가 삼각산 우이동 남쪽 동구에 창건한 사찰이다. 세조가 비록 불교에 우호적인 군주였고, 또 정의공주가 세종의 둘째 공주이자 세조의 누님이었다고 해도 척불(斥佛)을 국시로 하는 나라에서 도성 인근에 사찰을 건립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본래부터 있던 절터에 왕실의 원당(願堂)을 건립한다는 핑계로 공사는 불과 3개월 만에 신속하게 마무리되었다. 그 후 1464년(갑신년) 양효공 사후 다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벌여 30간 규모의 절을 90간으로 확장, 건물마다 형형색색의 단청을 올리고 황금과 벽옥(碧玉)으로 치장하여 마침내 그 규모와 화려함이 삼각산 제일을 자랑하게 되었다. 이는 곧 “권귀한 가문이 과시욕 때문에 쓸모없는 불씨(佛氏)에게 돈을 낭비하여 풍속을 어지럽히고 천리를 그르친다.”라는 세간의 비난을 야기하기도 하였으나, 그도 잠시, 정의공주와 아들 안상계가 잇따라 세상을 뜨자 도성암의 사세는 급격히 기울고 말았다. 임진년 왜란을 당해서는 법당만 남고 건물들이 모두 불타 없어져버렸는데, 후에 학준이라는 승려가 중수(重修)하여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그나마 숙종조 이후로는 역사 속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랬던 것인데 최근, 일본의 한 소설가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의 서계를 언급하면서 갑자기 도성암의 존재가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되었다. 소설 고니시 유키나가의 저자이기도 한 구보다 토시오가 벽제관 전투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낸 고니시의 서계(書啓) 한 장을 공개하였는데 그 말미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한성 북쪽 우이동에 도성암이라는 사찰이 있는데 누각들을 모두 황금으로 장식하여 그 화려함이 교토의 금각(金閣)을 능가하고도 남습니다. 그 후원에 거대한 미륵불이 서 있는데 아침햇살이 누각들을 비추면 그 빛이 미륵불의 안광에 반사되어 온 세상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이로써 도성 전체가 완연한 하나의 불국토로 변모하게 되니, 부처의 원력이 장안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하여 도성암의 누각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고자 하오니, 그렇게 되면 미륵불의 영험함도 사라져 마침내 조선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니 합하(閤下)의 성총 또한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
운무에 젖은 인수봉

구보다는 이 서찰을 근거로 고니시가 도성암을 불태우고 미륵불을 빼앗아 일본의 금각사로 가져가려 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는 요지의 글을 한 주간지에 발표하였고, 이 기사가 국내에 소개되면서 갑자기 도성암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커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숙종조 이후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도성암은 오늘날 그 절터마저도 확정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 그나마 수유리의 본원 정사, 우이동의 도선사, 선운각 등이 그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는 정도였다.


수유역 3번 출구에 도착하니 나쯔코와 강 교수가 벌써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빨리 움직여야 해요. 오늘 세 곳 모두 돌아보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으니까요.”


본원 정사로 가는 마을버스에 오르면서 나쯔코가 말했다. 빨간색 모자에 등산복, 등산화까지 나쯔코는 온통 빨간색 일색이었다. 


“지랄, 그놈의 빨리빨리가 교토 아줌마한테까지 전염됐나 보네. 모처럼 노는 날인데 술도 한 잔씩 마시면서 쉬엄쉬엄 가자구!”


예의 진한 스킨 냄새를 차 안 가득 풍기며 강 교수가 능글거리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강 교수의 트레이드마크인 진한 스킨 냄새 때문에 나쯔코는 그를 가끔 구루무 상이라고 불렀다. 


“전 궁금한 건 못 참겠어요. 어젯밤에도 꼬박 잠을 설쳤거든요.”


승객이 채 다섯 명도 안 되는 마을버스는 한신대학 정문을 지나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더니 어느새 본원 정사 입구에 멈춰 섰다. 상욱은 이전에도 여러 번  본원 정사를 찾은 적이 있었으나 아무리 봐도 옛 문헌 속에 묘사된 도성암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탈속적이고 신비적인 분위기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도심 속의 작은 사찰일 뿐이었다. 때마침 나한전(羅漢殿) 앞에서는 지역 도서관에서 실시하는 문화유적 탐방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린 자녀들과 함께 행사에 참여한 부모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해설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아닌 거 같네요.”


나쯔코의 첫마디였다. 


“왜?”


“도성암과 관련된 옛사람들의 글을 보면 무엇보다 도성암 제일의 장관은 계곡을 흘러내리는 우렁찬 물소리예요.”


“지금은 건기니까 수량이 줄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


강 교수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렇다 해도 90칸 규모의 절이 들어서기에는 이곳의 터가 너무 좁게 느껴져요. 그리고 땅의 형세를 봐도 그다지 어떤 비범한 기운이랄까? 그런 게 느껴지지도 않구요. 노가다 상의 생각은 어떠세요?”


“갑자기 웬 노가다 상? 설마 절 보고 하시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상욱이 정색을 하고 되묻자 나쯔코는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하며 금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머 박 선생님, 죄송해요… 그러게 옷 좀 제대로 차려 입고 다니시라는 말씀이에요.”


“세계적인 패셔니스트를 이해 못하는 나쯔코의 안목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곁에 있던 강 교수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글쎄, 내 패션이 어떻건 간에 아무리 봐도 이곳은 좀 아닌 것 같군요. 지금의 본원 정사는 일제강점기 초에 손덕선이라는 분이 창건했다고 하는데, 금강산 유점사에 주석하던 청암 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하다가 1920년대에 경성으로 올라와 이 절을 세웠다고 해요. 


“애걔, 겨우 1920년요?”


“일설에 의하면 본래 이곳에는 조선 후기에 창건된 도성암이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손덕선이 도성암을 중창한 셈이 되죠. 그런데 문제는 이를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런 걸 보면 아무래도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절의 역사를 만회하기 위해 꾸며낸 얘기 같기도 하구요.” 


“승정원일기에, 연잉군 방에서 도성암을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던데 혹시 연잉군 방에서 도성암을 이곳에 옮겨지었을 가능성은 없나요?”


나쯔코가 명부전 앞에 서있는 쌍사자 석등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죠. 당시에 절을 신축하기는 어려웠을 테니 옛 절의 이름을 빌려 새 절을 지었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러나 문제는 역시 기록이 없다는 겁니다.”                 


곁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강 교수가 문득 나쯔코에게 물었다.


“역시 같은 책에, 삼각산 동쪽 기슭의 도성암 이하로부터 길게 도봉산 접경까지 주변 삼사십 리의 땅과 사찰이 모두 연잉군 방과 연령군 방의 시장(柴場)으로 편입되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그 점에 대한 나쯔코의 생각은 어때?”


“글쎄요, 그 대목을 보면 도성암이 우이동 계곡에 있어야 맞는 거 같기도 하구요!”


“아무튼 내가 볼 땐 이곳 본원 정사가 옛 도성암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 더욱이 왜란 직후인 1595년에 전라도 보성 선비 정길이 쓴 ‘유 삼각산기’에는 도성암 뜰에서 백운대 인수봉이 훤히 바라다 보인다고 적고 있는데 이곳은 시야가 동쪽 불함산 방향으로 트여있고 북서쪽의 백운대 인수봉은 산성 주능선에 막혀 보이지 않으니 말이야.”

본원정사.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한 대한 불교 조계종 대각회 소속의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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