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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해당 이종헌 Nov 22. 2017

도성암을 찾아서 2

현해당의 북한산 이야기 25

가인 김병로 선생 묘. 김병로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며 법조인으로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본원 정사를 나온 세 사람은 수유리 영어마을을 지나 통일교육원 쪽으로 향했다. 


“통일에 대한 열망은 그 어떤 물리적인 힘으로도 막을 수 없나 봐요!”


웅장한 규모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통일교육원을 지나면서 철제 담장 밖으로 소나무 가지가 뻗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문득 나쯔코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보다는 오히려 통일에 대한 전 국민적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 몇몇 꼴통들의 행태를 저 철책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피, 하여간 구루무 상의 삐딱한 사고방식은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내 말은 나무만 보고 철책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철책을 뚫고 나온 나무의 생명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철책이 왜, 무슨 권리로 나무를 규제할 수 있느냔 말이지.”


“그래요. 순전히 철책의 잘못이네요. 이제 됐어요?”


이 준 열사 묘소를 지난 일행은 둘레길을 벗어나 운가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인 김병로 선생의 묘소를 지나면서부터 오르막이 시작되었으나 북한산성의 여타 등산로에 비하면 경사는 비교적 완만한 편이었다. 운가암을 지나 소위 진달래 능선이라고 부르는 곳에 오르자 금방이라도 쏙 하고 고개를 내밀 것 같았던 백운대 인수봉은 산성 주능선에 막혀 보이지 않고, 반대로 뒤를 돌아 동쪽을 바라보니 시야는 일망무제로 탁 트여 강북구와 노원구, 중랑구 일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도봉산, 수락산, 불함산, 아차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서있고 그 아래 펼쳐진 광활한 벌판은 비류 온조가 왜 이곳을 도읍지로 정했는지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삼국사기 온조왕 조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아들 비류, 온조 형제가 졸본부여에서 여러 사람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이곳 부아악에 올라 도읍지를 물색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저 광활한 벌판을 바라보니 과연 이곳이 한 나라의 도읍지로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


강 교수가 등산로 한쪽에 마련된 나무 벤치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저 벌판 어딘가에 하북 위례성이 자리 잡고 있었겠죠?”


“ 삼국사기 지리지 백제조에,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전한(前漢) 홍가(鴻嘉) 3년 계묘(癸卯, 기원전 18)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왕을 칭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또 같은 책 백제본기 온조왕 14년[기원전 5] 조에 온조왕이 한강 남쪽을 둘러보니 땅이 기름져서 도읍을 정할만하다 여기고, 7월에 한산(漢山) 아래에 책(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民戶)를 옮겼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은 기원전 18년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가 기원전 5년에 다시 한강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음을 알 수 있어. 두 개의 도성을 구분하기 위해 편의상 처음 정한 도성을 하북위례성, 천도한 곳을 하남 위례성이라고 불렀던 거고.”


“하남 위례성은 지금의 몽촌토성으로 추정되지만, 하북위례성은 그 정확한 위치가 어딘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이에 대한 박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어요.” 


나쯔코가 배낭에서 초콜릿을 꺼내 건네주면서 상욱에게 물었다. 


“글쎄요, 하북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 고려와 조선 시대 학자들은 오랫동안 위례를 직산(稷山)으로 비정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충청남도 직산의 위례산성을 주목해 왔으나, 일찍이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 직산설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또 남쪽으로 강을 건너 도읍을 옮겼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주목하여 하북 위례성의 위치를 한강 이북으로 보는 견해가 힘을 얻게 되었어요. 다산 정약용은 서울 혜화문에서 직선거리로 약 10리 지점에 있는 삼각산 동쪽 기슭에 옛 성터가 남아있으며, 또 옛사람들이 그곳을 한양 고현(漢陽古縣)이라 불렀다는 점 등을 근거로 삼각산 동록 일대를 하북 위례성으로 비정하였는데, 그렇다면 나쯔코가 앉아 있는 이 자리가 바로 하북 위례성이 되는 셈이죠.”


“백제 개루왕 5년 2월에, 북한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을 저도 본 적이 있는데 설마 이곳일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물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곳에도 오래전부터 중흥동 고석성이 존재하고 있었으니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죠!”


“그렇군요. 그럼 강 교수님도 북한산성을 하북 위례성으로 보는 견해에 동의하시는 건가요?” 


“어쨌거나 난 이 곳 북한산성보다는, 저쪽 연산군 묘 근처에 있는 방학동 토성이 하북 위례성일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어.”


“그렇군요! 어머, 그런데... 우리가 지금 한가하게 이런 얘기나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하북 위례성 문제는 나중에 좀 더 알아보기로 하고 오늘은 오직 오늘 임무에만 충실해야죠. 자, 빨리 출발하자구요.”


나쯔코의 재촉에 세 사람은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나 대동문으로 향했다. 


“조금 전 본원 정사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니 숙종 임금이 이 길을 통해서 본원 정사 앞을 지나 궁으로 돌아갔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 사실일까요?”


나쯔코가 앞장서 가다 말고 문득 상욱을 돌아보며 물었다. 


“글쎄, 문제는 도성암의 위치가 어디냐에 달려있겠죠.”


“제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때는 삼각산 제일의 규모를 자랑하였고, 숙종 때까지만 해도 그 소재가 분명했던 절인데 불과 3백 년 만에 그 위치조차 알지 못한다는 건, 뭐랄까 정말 한국 사람들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지금의 본원 정사가 도성암의 후신이라고 할만한 결정적 증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실인양 함부로 떠들어대는 태도도 그렇구요. 그렇지 않나요, 박 선생님?”


“아무튼 반성할 건 반성하고, 우리 문화재의 관리, 보존, 기록 등에 보다 정교함이 요구된다는 건 백 번 옳은 지적이에요.”


“그런데 숙종 임금은 어떤 경로를 이용해 이곳 북한산성을 방문했을까요?” 


“옛날 임금의 장거리 행차에는 주로 가교(駕轎)를 이용하였는데, 다른 이름으로 어가(御駕) 또는 대가(大駕)라고도 하며 말을 앞뒤에 한 마리씩 배치하고 들채를 앞 뒤 말의 멍에에 매달아 운행하는 형태라고 보면 될 거예요. 숙종 임금도 이 가교를 이용했는데, 중간에 길이 험한 곳은 어쩔 수 없이 인부들의 등에 업혀서 이동할 수밖에 없었겠죠.”


“박 선생님, 제 질문은 그게 아니고 숙종이 어떤 경로를 이용해 북한산성을 다녀갔냐는 거예요!”


“아, 참... 그 부분에 대해 제가 조사한 바로는...”


계속되는 오르막길로 인해 상욱은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그러니까 제가 조사한 바로는 숙종의 북한산성 행차에 대해서는 산성의 동문으로 들어가서 서문을 통해 환궁하자는 주장과, 서문으로 들어가서 동문을 통해 도성암 앞길을 통해 환궁하자는 두 가지 주장이 있었는데 숙종은 결국 후자를 택했습니다. 서문에서 도성까지는 삼십 리, 동문에서 도성까지의 거리는 사십 리, 서문을 통해 환궁하는 것이 동문을 통하는 것보다 십 리 정도 가깝지만 환궁 시각인 밤에 녹번, 모화 등의 험한 고개를 넘는 일이 안전 상의 심각한 위협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거죠. 그래서 거리는 조금 멀어도 동문으로 나와서 도성암 앞길을 지나 우이동, 수유리, 정릉, 동소문으로 이어지는, 비교적 평탄하면서도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대로를 선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전을 고려해서 일부러 도성암 길로 우회했다는 말씀이시군요. 강 교수님도 동의하세요?”


일행은 어느덧 소귀천 계곡에서 올라오는 길과 합류하는 지점에 도착했다. 대동문이 바로 코앞이었다. 


“바로 이 지점이었겠지. 대동문으로 나온 숙종의 어가는 바로 이곳에서 소귀천 쪽으로 방향을 틀어 도성암 앞길로 나갔을 거야. 이 소귀천 길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데다 숙종이 산성을 방문하기 전에 이미 군사들을 동원하여 길을 닦았으니 어가가 이동하기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을 테고.”


“그럼 결국 도성암은 소귀천과 우이동 계곡이 만나는 곳 어디쯤에 있었다는 말씀이시네요. 박 선생님의 생각도 같은 건가요?”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숙종실록에 이미 대동문에서 도성까지의 거리가 40리이며, 미아리, 수유리, 우이동을 거쳐 도성암, 대동문에 이르는 길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데도 수유리에 있는 본원 정사를 도성암으로 본다는 건 명백한 잘못이죠. 뭐, 도성암이 사라지고 난 뒤에 전혀 엉뚱한 곳에 같은 이름의 절이 생겨서 일어난 해프닝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요.”


대동문 지나 너른 공터에 다다르니 산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우리도 이쯤에서 좀 쉬었다 가자구요.” 


나쯔코가 성곽 바로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이 김밥, 정말 나쯔코가 직접 만든 거예요?”


배낭 안에서 주섬주섬 김밥을 꺼내는 나쯔코를 보고 상욱이 물었다.


“이 사람 참 순진하긴... 교토에서 어젯밤에 출발했는데 어떻게 김밥을 만들어. 순전히 수유역 김밥집 할머니의 작품이지. 어쨌거나 누구 작품이든 맛은 꿀맛이네.”


“어머, 구루무 상! 그래도 이 단무지만큼은 제 작품이라구요! 나쯔코의 변명 아닌 변명에 세 사람은 한 동안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자, 노가다 상! 이 술 한번 먹어보자구.”


강 교수가 배낭 안에서 신문지로 둘둘 만 술병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이양주라고 우리나라 전통 술인데 전통주 연구하는 친구한테 한 병 선물 받았어. 이번엔 생강을 좀 첨가해서 만들었다는데 어디 한 번 맛 좀 보자구.”


“어머, 저도 지난번 서울 왔을 때 이양주 맛본 적 있어요. 두 번 걸러서 이양주라고... 인사동에 전문점이 있더라구요. 자, 노가다 상도 한 잔!”


나쯔코가 등산용 스테인리스 컵에 이양주를 한 잔 가득 따라주었다. 노란 황금빛이었다.


“저도 예전에 이양주가 맛있다는 얘길 듣고 인터넷을 검색했다가 낭패를 당한 적이 있었죠.”


“어머, 낭패라뇨?”


상욱의 심각한 표정에 나쯔코가 궁금하다는 듯 목을 쭉 내밀고 물었다.


“어떤 사람이 블로그에 ‘이양주 정말 맛있어요!’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길래 들어가 봤더니 어처구니없게도 순전히 띄어쓰기가 잘못된 거였더군요. 이 양주 정말 맛있어요!” 


“에이, 싱거운 사람. 난 또 뭐라고... 자, 위하여~”


“강 교수의 건배 제의에 나쯔코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한 동안 웃음을 참지 못했다. 문득 연희의 환하게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무엇이든 챙겨주고 다정다감하게 보살펴주는 걸 좋아했던 연희가 싫었던 건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혼자서 생활해온 상욱에게는 연희의 태도가 매사를 간섭하고 구속하려 드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결국 견디다 못한 연희는 결혼 생활 3년 만에 딸 주니를 데리고 처가로 돌아갔다. 지도교수이자 장인인 최교수는 그런 상욱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세요?”


나쯔코의 물음에 상욱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남은 술을 단숨에 비웠다. 


“이곳 대동문으로부터 백운동 암문에 이르는 능선을 예전에 도성암령이라고 불렀던 것 같아!”


강 교수가 화제를 돌려 도성암령 얘기를 꺼냈다. 


“어떤 근거루요?”


“글쎄, 선조 때 병조판서 이덕형이 중흥동 산성을 돌아보고 와서 올린 장계를 잘 읽어보면 도성암령에 산성의 동문이 있고 그 밖에 수도암과 도성암이 있으며 그 밑은 곧 우이동이라는 기록이 있거든.”


“중흥동 산성의 동문이 현재의 대동문이 아니라는 얘기네요.”


“그렇지! 아마도 지금의 백운동 암문쯤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야.”


“박 선생님의 생각은요? 


“글쎄요, 당시 석가현에 동남문이 있었고 그곳을 통해 사을한리 즉, 오늘날의 정릉으로 왕래했다는 기록을 보면 우리가 앉아있는 이곳은 석성의 동남문쯤 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결국 도성암은 정릉 쪽이 아닌 우이동 쪽에 있었다는 결론이네요.”


“그래, 그러니 지금부터는 다시 숙종이 행차했던 길을 따라 도성암으로 가 보자구.”

운가암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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