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엔 지나온 삶의 흔적이 보인다
가끔 하는 상상이 있다. 로또 1등에 당첨이 되면 무엇을 할까? 하는 상상. 갖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나는 로또에만 당첨되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아직 로또 1등에 당첨이 안돼 봐서 모르겠지만...
처음 공항에서 일할 땐, 공항에 오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보는 게 참 재미있었다. 본국의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기 위해 일하러 온 외국인 노동자부터 아르바이트비를 모아 친구들과 함께 유럽 배낭여행을 가는 대학생, 출장 가는 직장인, 마일리지를 모아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고 여행 가는 가족, 우리나라에서의 쇼핑을 즐겨하는 다른 나라의 공주님 그리고 이름만 들으면 알 유명 CEO까지. 그리고 이 수많은 사람들을 겪어 보며, 내가 로또에 당첨된다면 부자는 될 수 있겠지만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화 몇 마디로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사람을 대하는 직업이다 보니 짧은 찰나에도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를 느낄 수는 있다.
어떤 사람은 ‘그냥’ 기본적으로 화가 나있는 사람이 있다. 공항 카운터에서 승객한테 하는 기본적인 질문, ‘어디로 가세요?’라고 물어도 그걸 왜 묻냐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묻는 말에 묵묵부답인 사람도 있다. 신기하게도 이런 사람들은 얼굴만 보고 대화 몇 마디만 해도 알 수 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케이스는 비즈니스를 타고 하와이로 여름휴가를 가는 가족이었다. 한눈에 봐도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가족 같았다. 리모와 캐리어와 명품 가방, 신발, 옷 그리고 명품 여권 케이스까지 모든 걸 풀세트로 갖추고 있었다. 높은 회원 등급을 보니 여행을 자주 다니는 가족이라는 것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잔뜩 찌푸린 얼굴로 카운터에 온 중년 여성 승객은 여권을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들고 온 짐이 생각보다 무거웠는지 짐을 내리며 큰 소리로 “XX 왜 이렇게 무거워?”라고 다짜고짜 욕을 하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나머지 가족 구성원도 비슷한 표정을 하고 서로를 탓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그거 빼라고 했지! 아침부터 짜증 나게”. “아 되는 일이 없네. 이거 네가 들어봐 XX. 얼마나 무거운지.” 나한테 직접적으로 짜증을 내거나 험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 기가 다 빨릴 것 같았다. 최대한 부딪히는 일을 없게 하기 위해 빠르게 승객을 보내고 앉아서 한참을 생각했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는 걸까? 내가 저 사람이라면 지금의 삶에 감사하고 행복할 텐데, 저 사람들은 왜인지 행복해 보이진 않는다.’
몇 달 후, 황금연휴가 낀 주말에 근무를 하는데 우연히 그 가족을 또 보게 되었다. 승객을 일일이 기억하는 일은 드문데 워낙 인상 깊었던 터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내 승객으로 받지는 않았지만 옆을 슬쩍 보니 이번에도 인상을 팍 쓰고 있었고 여전히 불평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어른들 말씀에 얼굴에 지나온 삶이 나타난다더니 그보다 정확한 말은 없는 것 같았다.
퍼스트 클래스를 타건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건 이코노미 클래스를 타건 화나 있는 사람은 화나 있고, 우울한 사람은 우울해 보인다. 얼굴이 밝고 평안해 보이는 사람은 실제로도 밝고 편안하다. 상대방의 인사를 받아줄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은 캐빈 클래스에 따라 나뉘는 게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뉘는 것 같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금 거울을 보며 내 얼굴엔 어떤 발자취가 남았는지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