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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색 Mar 13. 2022

[창작 소설] 그 여자 그 남자 안전거리

시작해 놓고 끝내지 못한..

기다리는 여자, 출처: Pexels

<그 여자>


드디어 그 녀석이 왔다. 오지 않는 녀석을 기다리는 조급증을 더 이상 감추기 힘들어질 찰나 그가 왔다.


모임 자리에 도착한 순간부터 내내 그랬다. 누군가 우리 자리 쪽으로 올 때마다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 녀석인가 확인하고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조금만 더 늦어졌으면 참석여부를 직접 물어보러 나설 참이었다.


그렇게 내내 안절부절, 몇 번이고 들썩이던 엉덩이를 잠시 잠깐도 의자에 붙여두지 못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자존심도 없이. 제길.


오늘도 어김없이 단짝 친구와 함께다. 참기름처럼 능글거리는 넉살 좋은 친구 녀석이 아는 체를 하기에 고개를 주억거리고 바라본 그 녀석과는 눈인사만 했을 뿐. 그 흔한 인사말도 생략할 만큼 긴장했다. 속마음을 들킬까 봐 풀어지는 표정을 단속하고 시선조차 두는 둥 마는 둥 애쓰고 있는 스스로가 가여울 지경이다.


그 녀석과 나 사이에 단 한 사람 끼여 앉아 있다. 손만 뻗어도 닿을 가까운 거리가 어찌나 멀게 느껴지는지, 아쉬움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는데 그 녀석의 목소리가 확성기에 대고 얘기하는 것처럼 크고 또렷하다. 주변의 소음에도 바로 옆에서 말하는 듯 귀에 쏙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 감추려 안 들리는 척 관심 없는 척을 해본다.


벽에 걸린 시계의 시침이 12를 가리키고 있던 터라 조금 한산했던 가게 안이 그와 친구의 등장으로 시끌벅적해졌다. 인사를 나누며 자리를 잡는 녀석들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번잡스러워졌다. 때를 틈 타 마음껏 그의 얼굴을 살폈다. 몇 개월 만에 보는 얼굴빛이 창백한 데다 야위어 있다. 평소 장난기 가득한 표정도 자취를 감췄다. 일이 많이 힘든가 보다.


그 녀석의 홀쭉한 뺨이 내게 말을 거는 듯하다. 따뜻한 손길이 필요하다고. 아니 이건 나의 욕망인가.


너무나 수줍고 소심한 나는, 그의 뺨을 쓰다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감히 실천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저 목마른 사람처럼 쳐다볼 뿐이다. 열기를 담고 말이다. 짧은 순간 눈으로 그의 뺨을 어루만진 후 무심하게 그 녀석 주변 사람들 무리에 시선을 던진다. 그리고 또 한동안 멍하니 있었나 보다. 아련하게 안개가 낄 것 같이 시야가 흐려졌어도 부감처럼 그의 얼굴만 선명하다.


석양을 배경으로 한 남자, 출처: Pexels

<그 남자>


그녀가 있다. 어디에서도 내 눈에 제일 먼저 뛰어들어오는 그녀가.


밀린 일과 끝없이 쌓이기만 하는 추가 업무에 치여 오늘 모임에 올 수 없을까 봐 얼마나 애가 닳았던가.


올 시즌 오프 영업실적에 대한 압박과 신상품 출시 기념 이벤트에 대한 대리점주 미팅, 조율 등으로 최근 한 달 가까이 야근의 연속이었다. 몸과 마음 모두가 피로와 스트레스로 물 먹은 솜처럼 무겁고 너덜거리는 느낌이었다.


학교 앞 술집이 늘어서 있는 번화가 입구에서 친구를 만나기 전 잠시 고민했더랬다. 이대로 몸을 돌려 집에 돌아가 침대에 눕고 싶을 정도로 온 몸이 휴식을 외치고 있었다. 고민은 잠시였다. 역시나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자마자 뛰어온 친구 녀석을 보니 너털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위로가 되는 그녀의 얼굴이.


무거운 걸음이 거짓말 인양 자석에 끌리 듯 내달렸나 보다. 정신을 차려보니 모임 장소였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한쪽 구석에 자리한 그녀가 한눈에 들어왔다. 순간 몸의 피로뿐 아니라, 한 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영업압박에 대한 스트레스도 한순간 잊어버렸다. 지금까지 힘들었던 모든 것들에 대해 보상받은 느낌이었다.


얼굴 전체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그녀의 처진 눈꼬리, 상기된 볼과 귀엽고 앙증맞은 코, 물기를 머금은 입술까지 여전하다. 기억하는 그대로다. 기억이 생생한 현실과 오버랩되면서 잔잔한 내 마음에 또 물결이 친다. 그래서 깨닫고 만다. 그녀가 참 그리웠구나.


왠지 그녀는 그냥 그렇게 여전한 모습으로도 내게 위안이 되어준다.


그녀가 아는 체를 해주지 않아 안달 나는 마음을 다잡고 근처 빈자리-옆자리가 아니어서 아쉬웠으나 다행히 그녀가 손에 닿을 듯 가까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친구와 후배 녀석들이 반갑게 말을 걸고 술을 권해 주었으나 고마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모든 신경이 그녀에게 향한다.


누구의 질문에도 매 순간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으므로 그녀를 향해 조금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 눈은 자꾸만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보고 싶은 마음에, 버릇처럼 그녀 주변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다가 목표를 잃은 채 허공을 배회하고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따뜻한 열기가 전해지듯 그녀의 시선이 닿은 내 볼 언저리가 뜨끈해지면서 체온이 상승하는 듯하다. 온몸의 피가 빠르게 순환하고 있는 걸까? 조금 가슴이 울렁거리고 뒤이어 한숨 한 모금 내뱉고도 참을 수 없는 갑갑증이 든다.


그녀는 너무나 둔하다.


내 마음이 이렇게 커져갈 동안에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그녀 빼고 모든 지구인이 알 때까지 눈치 채지 못할 기세여서 더 애가 탄다. 그럼에도 섣불리 고백하려 그녀 앞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용기가 없어서도, 거절이 두려워서도 아니다.


수많은 가상 시나리오 속에서 가장 두려운 건 고백 후 그녀의 반응이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무심함 그리고 잊히는 것'이다.


곰탱이라는 별명같이 둔하기로 둘째 가면 서러울 그녀가 혹시나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것은 아닐까. 선후배라는 지금의 안전거리와 편안한 관계를 지키려고 하는 그녀가 나의 고백 후, 어색해져 버리는 상황이 됐을 때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것을 택하는 건 아닐까. 깨끗하게 잘려나가 이렇게 선후배 관계로 만날 기회마저 잃는 건 아닐까 두려워서다.


그녀가 영영 멀어져 버릴까 봐 두려운 나머지 나는 매번 고백을 생각하지만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지금의 안전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 위태로움 속에 안전거리를 지키고 있다. 시간이 흘러 안전거리는 더 견고해져 가고 나는 그것을 깰 용기와 힘을 차츰 잃어가고 있다.


어쩌면 건널 수 없는 강 건너에 서있는 건 아닐까 자포자기 심정이 된 나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다.



오래전에 써 놓은 단편 소설인데.. 뒷 이야기에 대해 구상만 하다가 완결 짓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미해결 과제처럼 부담감만 남아있고 무언가 다음으로 전개가 나아가지 않아 방치 상태다.

뭐.. 시간이 오래 걸려도 언젠가 마무리 짓겠지 싶어서 일단 내 브런치에 옮겨 놓기로 했다.

포기하지만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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