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꺼이 동화 속을 헤엄쳤다.
맨 발로 비에 젖은 도로를 달렸다. 모두 잠든 아주 밤에.
우리는 그런 대화를 나누곤 했다.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면 나가서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달리고 싶다고. 보슬보슬 내리는 비 말고, 세상이 모두 씻겨 내려가는 듯이 퍼붓는 빗속을 달려 보고 싶다는 대화를 나눴었다. 그런 비는 자주 내리지 않았다.
안개가 가득한 날이면 보슬비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 창 밖에 코를 붙이고 앉아있었다. 고층으로 이사 온 이후로 비 소리는 듣지 못했고 창가에 남은 비 자국만 겨우 구경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비였다. 억수 같이 쏟아붓는 그런 비! 그것도 마침 오늘. '마침'은 하루 종일 행복하던 날, 편안하던 하루의 끝에 마침이었다. 행복하던 하루의 마무리처럼 비가 쏟았다.
퇴근 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허겁지겁 가방을 집에 던져두고 나왔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비속으로 뛰어드는 우리. 동생이 물 웅덩이를 찾아 첨벙거렸고 그때부터 나는 무언가에 심각하게 빠져든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낙엽만 굴러가도 웃던 그 시절의 우리가 된 듯했다. 지금은 세상이 동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며 텅 빈 도로를 헤엄치는 동생에게 소리쳤다. 동생은 우리가 오늘을 동화로 만든 거라고 답한다. 비는 쉴 틈 없이 쏟아지고 메말랐던 이끼처럼 우리는 비를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머금는다. 푸릇한 생기가 부풀어 오른다. 행복하다는 말에 오늘이 다 담길 수 있을까. 넘쳐흐를 것 같아서 마음으로 좋아하는 단어를 읊었다.
동네를 돌고 돌아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를 샀다. 다 그치지 못한 먹구름처럼 비를 머금은 우리를 따뜻하게 받아주신 편의점 사장님도 우리의 행복에 동조한 셈이다. 빗물을 마시는 건지, 맥주를 마시는 건지. 같이 섞여 들어 입 안에 쏟아지는 맥주가 달았다. 이걸 빗물이 달다고 해도 될지.
한 캔을 비운 건 순식간이었다. 빗물이 가장 많이 고인 곳에 발을 담그고 앉았다가, 첨벙 거리며 뛰어놀았다가, 가로등 조명 아래에서 춤을 추다가, 노래도 불렀다. 우리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했다. 빗물이 반짝이는 길 위에 동생이 누웠다. 지금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놀이터를 찾아 미끄럼틀을 내려오다 엉덩방아를 찍고, 그네를 타고, 다시 춤을 추고, 첨벙 거리기를 반복하다 보니 새벽이 되었다. 2시간 동안 빗속을 돌아다녔던 것 같다.
우리는 피하지 않아도 되었다. 맞았고, 젖었고, 맨발이었고, 어디에도 누워서 비가 떨어지는 하늘을 봤다. 하면 안 되는 것은 없었던 제약 없는 자유로운 세상에 잠시 다녀온 듯 이유 없는 웃음이 가득했다. 이유는 없었고 행복은 있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밤. 우리는 그날 세상에서 헤엄을 쳤던 것 같다.
거리에 조명이 하나, 둘 꺼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동화가 막을 내릴 시간인가 보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집으로 향하는 길, 그네를 타며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 길을 걸으며 나눴던 대화, 오글거리는 말이라던 말은 모두 내게 힘이 되었다.
동화책을 덮고 나면 등장인물들의 뒷 이야기에 대해 상상을 했다. 동화 속에는 하루 내지는 인생에서 특별했던 며칠만 이야기가 풀어져있다. 책을 덮고 해피엔딩이 아닌 결말을 상상하는 아이는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아니, 우리 반에는 한 명도 없었다.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끝 문장에 굳이 토를 달지 않는다. 주인공의 행복에 함께 동조할 뿐이었다. 우리가 맞은 오늘의 동화가 그랬다. 누렸던 행복에 구태여 토를 달지 않았고, 그날의 행복에 비교해 현재를 실망하지도 않았다. 동화책은 마지막 장을 덮었을 뿐이다. 우리에겐 아직 펼쳐보지 못한 동화가 많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 매일 주어지는 오늘, 새로운 이야기를 감사하며 써 나간다.
언젠가 다시 쏟아부을 비를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