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새> 김보라 감독의 편지
세상의 모든 은희들에게
안녕하세요. ‘벌새’의 감독 김보라입니다.
때때로 저는 내가 이상한 건 아닐까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기억하는 내가 이상한 건 아닐까.
한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내가 예민한 게 아닐까 체념하며 어떻게든 다시 적응하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세상에 나누고 알았습니다. 모두가 자기 안에 ‘이상하고 예민한 은희들’을 갖고 있음을요. 그 ‘은희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을 때, 저는 놀라고 감사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견딜 수 없던 밤들에 벌새를 썼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나와 같은 밤을 보낸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길 바랐습니다. 영화가 개봉되고 당신들에게 받게 된 답장은 나를 길게 위로해 주었습니다. 위로라는 말로는 부족한 어떤 만남이었습니다.
벌새는 천만 영화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세상에 내놓고 관객들의 무수한 일상과 역사를 듣는 경험, 그것은 숫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수많은 은희들이 나눠주셨던 이야기에 때로 혼자라고 느꼈던 많은 밤들이, 꽁꽁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이 녹는 것 같았습니다. 이 온기가 벌새를 만들던 모든 시간들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이 온기는 앞으로 제 삶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을 것입니다. 마치, 영지가 남긴 온기로 앞으로 잘 살아갈 은희처럼
다시 칠흑 같은 밤이 오면, 저는 당신이 나눠준 온기를 꺼내어 불을 밝힐 것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보라 올림.
언제 쓰여졌을지 모를 ‘김보라 감독’의 편지를 읽었다. <벌새>를 보고 여러 소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참 좋았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김보라 감독의 영화 이야기를 듣는 것도 큰 행복이었다. 오늘 다시 이 편지를 접하며 따스한 온기를 느낀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육아와 생활에 지치고, 힘들고, 답답했던 나는 k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었었다. 그때마다 듣는 말들은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살아, 네가 너무 예민해’ ‘너만 그렇게 생각해. 누가 그런 생각을 하니’ ‘왜 그렇게 다르게 살려고 하니’등의 말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여전한 현실에 다시 힘들어졌을 때, ‘너만 생각을 바꾸면 되잖아’, ‘난 아무렇지도 않아, 괜찮은데’라는 말을 들었다. 김보라 감독처럼, 이 세상의 윤희들처럼, 나도 ‘체념하고 적응하려’ 애썼다. 매번 적응하지 못하고 화나고 답답하고 짜증 나는 내가 부족하고 모자란 것 같아서 말이다.
지금이라도 그러지 않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그렇다고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해결될 리는 없지만, 적어도 나의 감정과 시선(생각)은 달라진다. 나를 향한 나의 태도가 달라진다. 타인을 향한 나의 태도도 달라진다. 나도 좀 더 많은 이 세상의 윤희와 만나고 싶다. 벌써 그렇게 하고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