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고, 스포 잔뜩 포함
주말 저녁 홀로 시작한 영화이다.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지만 영화관에서 보는 걸 놓쳤다. 놓치고 나니 시간이 흘러가는 줄로 모르고 있다가 어제서야 마음이 끌렸다. 뭐든 때가 있나 보다. 결론적으로 영화관에서 보지 못했던 게 아주 아쉬운 영화였고 봄의 끝자락에서 마음을 요동치게 만드는 아름다운 영화였다. 그리고, 충격적이었다. 사람의 얼굴, 표정이라는 게 누구와 함께하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따라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다니.
영화의 시작으로 들어가 보자. 망망대해인듯한 어느 곳 아슬하고 불안한 배 위에 마리안느가 있다. 마리안느는 양손으로 배를 잡고 흔들리는 바다 위를 지나가고 있다. 남자 몇 명이 같이 타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한 사람이 노를 젓고 있다. 풍랑에 위아래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배는 노를 젓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보고 있는 나도 뱃멀미를 할 듯 울렁댔다. 그 순간 마리안느의 짐인 큰 나무 짝(나중에 도착해서 열어보는 것으로 알 수 있는데 그곳에는 아주 큰 캔버스가 들어가 있다)이 배에서 떨어진다. 마리안느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다로 뛰어든다. 캔버스가 든 나무 궤짝을 건져내고 추위에 벌벌 떨어대던 마리안느는 멀리 보이는 육지의 희미한 모습에 안도한다. 사실, 마리안느보다 내가 더 안도했다. 바다의 울렁임과 마리안느가 추위에 떠는 모습은 보고 있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에서 바로 뛰어들어 자신의 짐을 건져내는 마리안느는 멋있었다. 깊은 바다(나는 바다, 아니 물을 무서워한다) 속으로 나는 뛰어들 수 없다. 누구에게 말하지도 부탁하지도 않고 스스로 해결하는 모습은 18세기 후반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21세기 나의 눈에는 부럽고 멋있는 강렬한 첫 장면으로 다가왔다. 이후에도 마리안느는 혼자서 젖은 옷에 나무궤짝과 짐을 양쪽에 매고 언덕을 오른다. 그렇게 도착한 성, 혹은 집.
그곳에는 엘로이즈가 유배당해 와 있다. 감금되어 있다고 해야 하나. 마리안느는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이곳에 왔다.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공간과 인물과 이야기에 대해. 설명하기보다 한 장면 장면 벗겨낸다. 그 장면 장면이 매우 아름답다. 바다와 하늘과 파도와 바위와 절벽과 절벽의 수풀과 집, 계단, 문, 벽난로, 모닥불, 불빛, 아침과 낮, 저녁, 밤, 어둠 속 불빛에 비친 얼굴, 표정, 그리고 초상화. 영화 속에서는 많은 대화가 없었다. 그럼에도 짙은 울림을 가지는 것은 인물들이 보여준 얼굴과 그 속에 표정에 있다. 영화의 많은 부분은 서로를 바라보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얼굴이었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각자 삶의 틀 속에 있었을 때 얼굴도 표정도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러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주고받고 대화할 때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다. 얼굴과 표정에 기운이 돌고 생기가 돌고 달라진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 때문에 사는 삶이 달라지면 사람의 모습이 얼굴이 표정이 이렇게 바뀌는구나. 나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지어지는 ‘나의 표정’이 떠올랐다. ‘죽어있던 나의 표정’이 떠올랐다. 굳은 표정은 저절로 지어진다. 누구와도 공감하고 교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짓는 무감각한 표정 말이다.
영화는 내가 본 퀴어영화 중 처음으로 ‘몸이 반응한’ 영화였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에 나도 함께 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내가 영화 속 ‘그들과 다르지 않은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들과 다르지 않은 여자’라는 것은 단순한 이분법적인 구분을 말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하인 역할로 나오는 소피와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다르지 않는 여성으로 함께 도와가며 서로의 힘든 부분에 손을 내밀며 함께 하는 모습처럼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동질성’을 확인하고 그로 인해 ‘자연스러운 연대’가 생기는 것이다. 소피가 엘로이즈와 엘로이즈 언니의 자살을 대하는 태도, 마리안느의 생리통을 도와 따뜻한 뭔가를 만들어주고, 마르안느와 엘로이즈가 소피의 임신에 물어보고, 낙태를 도와주고 그림으로 남기는 모습은 그래서 아주 중요하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고 아름다운 영화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가 더 더해진다. 바로 음악이다. 영화 전반은 조용하다. 자연의 소리가 함께한다. 바람소리, 파도소리, 벽난로 속 나무 타는 소리, 그렇게 흘러가던 영화에 첫 음악은 마리안느가 치는 피아노 건반 소리다. 그것도 천으로 덮여있는 피아노에 손을 넣어 친다. 그 모습은 나에게 매혹적이고 관능적이기까지 했다. 엘로이즈가 피아노(아! 검색하고 보니 이 악기는 피아노가 아니고 쳄발로라고 한다)에 덮인 천을 벗겨주고 마리안느는 피아노 건반을 치며 들려준다. 감독은 18세기라는 시대가 음악을 접할 수 없는 시대였고 예술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경험이고 기억인지 알려주고 싶어서 하나도 넣지 않으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삽입 된 곡이 이 곡이고 ‘비발디 사계 중 여름’(감독은 되도록 많은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곡을 삽입하여 예술의 중요한 기억으로 남게 하고 싶었다고 한다)이다. 나는 사실 이 곡이 사계인지 여름 인지도 모르고 들었다. 그저 가슴을 두드리는 요동치는 움직이게 만드는 곡이었다. 감독은 이미 알고 있는 곡으로 더 큰 기억으로 남게 하고 싶었다고 했지만, 나에겐 모르는 곡이었지만 강렬한 엔딩을 선물해주었다. 여기에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첫 그림으로 나온 모닥불 씬에서 나온 노래(타오르는 젊은 여인)도 울림을 더한다.
3월에 원화전도 했다는데 아쉽다. 영화 속 첫 그림은 다시 한번 보고 싶다. 기억력 젬병인 내가 ‘기억해보고 싶은 하나’가 또 생겼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감독 ‘셀린 시아마’, 그의 다음 영화가 기대된다. 타오르는의 흥행에 힘입어 2011년작 영화인 톰보이가 개봉 확정되었다고 한다. 5월에 이 영화를 보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