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외모, 살은 무엇일까? 지금 내가 근무하는 p의 아이들은 자신의 키와 살과 얼굴 형태와 머리카락의 길이와 피부 색깔에 대해 민감하다. 민감하다는 것이 늘 문제 될 것은 없다. 무슨 문제든 나의 피부에 스치 듯 예민한 촉각을 곤두세우는 일이 늘상 나쁜 일은 아니까? 그러나, 여기에서 민감하다는 것은 살이 쪄있음을 피부가 하얗지 않음을 키가 작음을 얼굴에 살이 있어 둥글둥글함을 아이들은 ‘부정’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 ‘부정’은 놀리는 대상이 되기도 하고 화가 났을 때 공격하는 대상이 되기도 하고 나의 우월을 증명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고, 배제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아이들은 ‘보편이라는 또 다른 특권’<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p9을 향해가는 것일까. ‘보편의 자리에 위치하려면 특별한 힘이 필요하다. 특정함을 보편으로 보이게 하는 힘’ 살이 붙어있다는 게 느껴지지 않는 얇은 팔, 다시, 얼굴은 어린이의 보편의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마른 체형-특정함을 아이들은 ‘보편’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보편에 들지 않는 아이들을 놀리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아이들은 자기 자신이 그러할 때 죄책감을 느낀다. 나의 몸은 왜 그럴까. 나도 노력하는데 나의 몸은 왜 변하지 않을까. 다이어트란 말은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대변해주는 고유명사이다.
“내 장애에 노련한 사람이 어딨나요?”라고 서울대학교 장애 인권 동아리 턴투에이블이 물었다. 나는 “여기 나 있는데.....”라고 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갖춘 노련함의 기술이 나를 우아하게 혹은 행복하게 만들었는지는 의문이다. 노련한 인간이 되기 위해 한순간도 쉬지 않고 나를 관찰했던 시간은 피곤함 그 자체였다. 내 몸은 우아함의 발가락 끝에라도 닿아 있는가? 내 몸에서는 빈곤의 흔적이 나타나는가? 내 다리는 조금이라도 길어 보이는가? 나는 우중충하고 우울한 장애인 같은가? 단 한순간도 성찰의 시각을 거두기 어려웠다.-<실격당한 자를 위한 변명>
다이어트가 우리 사회의 고유명사가 되고, 아이들은 어린이일 때부터 내 몸에 대한 자기 관리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과거와 다른 ‘노련함’ 아닐까? 고기와 튀김은 살이 찐다. 저녁에 많이 먹으면 안 된다. 우걱우걱 먹는 것은 돼지 같다. 과식은 다이어트의 적이다. 최소한 누구나 이 정도의 지식을 알고 있다. 이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아이들은 ‘노련’ 하지 못한 것이다. 노련한 생각에 이어 노련한 행동까지 배우고 학습한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는 것일까. 엄격한 ‘자기 관리’<퀴어는~p55>를 하며 내 몸에 대한 스펙을 어린이일 때부터 쌓고 있는 것일까. 그들의 ‘노력’으로 다른 몸의 누군가는 ‘노력’<퀴어는~p21> 하지 않는 몸이 되어 존중받지 못할 가능성이 커진다. 아이들은 오히려 나이 많은 나를 안타깝게 여긴다. 아이들은 듣고, 배우고, 학습하는 이러한 다이어트의 ‘노련함’으로 ‘보편’과 다른 몸을 ‘배제’하고 ‘부정’할 타당한 이유를 얻는다. 아이들은 김원영 작가만큼이나 피곤하다. 어린이의 에너지를 잃어간다.
‘한 설문조사에서 최근 한 달 동안 외모를 비하하거나 평가하는 발언을 들은 적 있다는 이가 10명 중 6명꼴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같은 책 p57>이는 우리 p의 아이들에게 적용해도 비슷하지 않을까. 아이들은 집과 학교와 p에서 나의 외모를 비하하거나 평가하는 발언을 얼마나 들을까. 어떤 발언을 들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