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예인가, 아닌가

김규항 ‘혁명노트’를 읽고

by 붉은낙타

김규항은 노예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없는 자’라고 말하며 글 내내 혁명을 하라고 말한다. 물론, 직접적으로는 단 한 줄도 선동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불가능할 것 같은, 불가능한 자본주의를 마르크스 사상으로 해부할 뿐이다.

마르크스 사상의 근간이 되는 시대적인 흐름을 정리하면서 나온 중세 봉건제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인상적이었다. 중세 봉건제는 기독교였으며 농노는 노예와 달리 자신도 영주처럼 인간이라 생각했지만, 둘의 신분은 신이 정한 거라 믿었다는 것이다. 또한 진정한 인생은 죄로 물든 현세가 아니라 죽어서 갈 내세라 믿었고, 농노가 영주의 호화로운 삶과 제 곤궁한 삶을 비교하거나 분노할 이유는 없었다는 것. 그렇다면, 2020년 대한민국의 ‘인민’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불안 그리고 그로 인한 합리적 이성의 상실, 신천지라는 말도 안 되는 교리에 몰려드는 청년들은 중세와 달리 설명 가능한 것일까.

이미 무덤에 묻힌 책일 것 같은 마르크스의 <자본>과 <공산당선언> 헤겔의 <변증법>을 2020년 세계와 대한민국의 현실과 ‘인민’을 분석하며 칼로 도려내듯 냉정하게 설명하고 설득한다. 책을 첫 부분에서는 너무나도 힘 빠지는 자본의 거대한 힘에 대한 확인, 그 소용돌이 속에 서있기조차 힘든 인민의 모습에 도대체 뭘 말하려 하나, 그래서 어쩌라고? 어쩌자는 거지? 싶었다. 그럼에도 책 읽기를 중도에 그만두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거대한 자본주의 속에서 휘둘리는 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 또한 스스로 노예로 살고 있지는 않을까’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원시인이 자연현상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은 도무지 해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원래 그런 것’이라 치부하는 습성이 있다. 물신성에 대한 이해가 없는 현대인에게 자본주의에서 삶은 해명할 수 없는 자연현상 앞에 선 원시인과 다를 바 없다.(중략) 한국이 민주화 이후 불과 20여 년 만에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젊은 세대가 제 나라를 ‘지옥(헬조선)’이라 부르게 된 건 한국이 이전보다 빈곤해져서는 아니다. 경제 양극화 역시 전적인 이유는 아니다. 원인은 한국인들이 삶과 관련한 모든 것들(자기 자신을 포함하여)이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상품화하며, 삽시간에 극단적 물신 사회에서 살게 되었다는 데 있다. 유례없는 물신화 속도와 강도의 충격 속에서 개인들이 제 나름의 삶의 의미를 유지하거나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혁명 노트> 중.

책의 중반 정도부터 나오는 ‘물신성’에 대한 이야기는 그래서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디에, 어떻게, 어느 만큼 종속되어 있는가, 길들여져 있는가, 되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이어져 나오는 협동조합의 이야기, 예술가에 대한 지원금 이야기 구조 등은 현실적으로 나의 주변 이야기이기도 하고 나의 이야기이기도 해서 다른 이들과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주의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현실’을 좇는 일이다.(중략) 탈근대, 거대담론 폐기의 흐름은 ‘파리의 CIA 요원’들이 그들의 언어로 단언했듯 서유럽 마르크스주의가 물신 세계의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파산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것은 철학적 독일 관념론을 기반으로 한 이상주의 사유가 미국식 자유주의의 실증주의-경험주의에 의해 괴멸되어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상주의는 그 고질적 오해처럼 현실과 무관한 몽상을 좇는 일이 아니라 ‘마땅히 그래야 하는 현실’을 좇는 일이다.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학교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국가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같은 근본적 질문이다. 이상주의는 인간을 제가 처한 세계와 마주 선 주체적 인간으로 만들어준다. 헤겔이 정립한 근대적 변증법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현실 속에 새로운 사회의 씨앗이 자라고 있으며 결국 극복되고 변화한다고 보는, 이상주의 사상의 결정체다.(중략) 인민은 자신을 해방하는 역사의 주인이자 노예의 삶으로 밀어 넣는 역사의 주인이다.(중략) 젊어 한때 혁명운동 언저리에 몸담은 경험이 있는 자유주의자들은 ‘지난 역사’에서, 혹은 ‘다른 사회’에서 혁명가에 깊은 호감과 존경심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 중 일부는 그 혁명가들을 소재로 소설이나 전기를 쓰기도 한다. 그들의 태도는 자신이 정당하고 적절한 혁명은 동의한다는 의미,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혁명은 정당하지도 적절하지도 않다는 의미를 동시에 담는다. 그들에겐 미국 원주민 속담 하나가 유익할 것이다. ‘먼 곳에서 용감하기는 쉽다. 쉬울 뿐 아니라 매우 안전하다’ -<혁명 노트>중

역사의 주인일 수도 노예의 삶으로 밀어 넣는 역사의 주인일 수도 있는 인민, 혁명가에 대해 동의하고 존경은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혁명은 정당하지 않고 적절하지 않다는 인민, 김규항은 ‘인간 의식은 주조될 수 없으며, 오로지 스스로 변화한다’고 하며 ‘회의해야 할 건 혁명이 아니라, 고정관념 말고는 혁명에 대한 아무런 견해도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글의 말미에 이르러, 그는 혁명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야기를 한다.

변화는 ‘질문의 재개’로 시작한다. 또한,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의 재개다. 물신 세계에서 인간은 모든 ‘첫 질문’을 잊는다.(중략) 인간은 굶거나 매 맞지 않아도 혁명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중략) 혁명은 인민의 자기 해방이다. 자기 해방은 내가 해방의 주체라는 의미다. 억압 상태에 있는 나를 다른 사람들이 빼내 줄 수 있다. 그것은 ‘구출’이지 해방은 아니다. 해방은 나를 억압하는 시스템 앞에 서는 일, 내가 그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 앞에 서는 일을 씨앗으로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더는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결단에 이른다.- <혁명 노트> 중

김규항의 말대로라면 ‘물신 세계’에서 노예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살기 위해 ‘인민’은 혁명해야 한다. 누가 해줄 수 있는 혁명이 아니다. ‘자기 해방’이다.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라고도 한다.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는 ‘혁명’에 대한 이야기는 책 전체를 읽고 난 말미에 이르러 자본주의에 맞서는, 맞설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중세시대 노예와 2020년 한국의 인민이 왜 다를 바 없는지 글을 읽은 이라면 알 수 있다.

처음에 책을 받아 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의 글로만 온전히 채운 것’이 낯설었다. 그 흔한 추천사 하나 없는 책, 광고 글 하나 없는 책, 재생종이로 가볍게 만든 책에서 작가의 고집이 느껴졌다. 첫 장을 열기 전 나는 그 고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뭔 말을 하려나 삐딱하게 책을 넘긴 게 사실이다. 하긴 요즘 뭐든 부정적이긴 하다. 마지막 장을 덮은 지금 그 고집에 대한 느낌은 좀 달라졌다. 고집 좀 부려야겠다. 부려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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