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by 붉은낙타



나는 오랜 기간 초등학생들과 일을 해오고 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느낀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가 바로 유튜브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튜브를 통한 가르침’이라고 해야 할까?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통해 삶을 배워야 한다고 하는데 이제는 뒷모습을 통해 배우기 역부족이라고 해야 할까? 단지 역부족이면 모르겠는데 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모습’에 강한 거부감과 불쾌감을 느꼈다. 내가 아이들의 모습에 대해 이상하다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이해하기보다는 먼저 감정적으로 혐오감을 느꼈나? 싶기도 하다. 그렇다.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이들이 재미있다고 표현하는 ‘상황’이나, 재미있게 하려고 말하려는 ‘말’이나, 배우는 ‘정보’에 대해서 나는 이상하다고 느꼈다. 나중에서야 그 이상한 것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것이었고, 아이들은 유 선생님에게 흡입력 있게 배우고 있었다. 현실의 다른 선생님들은 너무 고리타분할만큼 말이다. 아... 진심으로 나는 고백하고 싶고, 호소하고 싶고, 도움을 받고 싶었다. 나의 이런 기분과 내가 만나는 지금의 아이들 사이에 어찌할 바 모르는 지금의 나에 대해서 말이다. 나의 거부감과 불쾌감의 첫 번째에는 혐오가 있고, 두 번째에는 익숙하기 힘든 말투, 억양, 소리가 있고, 세 번째에는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소재 중심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재 아이들에게 누구보다 흡입력 있는 교사는 유튜브라는 사실이다. 그런 와중에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이가>라는 책 제목은 단비처럼 다가왔다. 어서 빨리 해답을 찾고 싶었다. 혹은 누구도 나처럼 고민하고 있구나 보고 싶었다. 그렇게 책을 잡았고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아래 ‘’ 안은 책의 문장 인용함)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40~50대가 경험했던 지식의 토대가 더 이상 10대들에게 지식의 토대로 통용되지 않는 시대‘라고 한다. 지난 시대는’ 시험을 보기 위해서 텍스트를 봐야 ‘하는 시대였지만 지금은 ‘예전 같은 텍스트의 위상은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다. ’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말하고 듣는 것이 읽고 쓰는 것으로 전환되었다면, 지금은 정보나 이야기를 ‘읽고 쓰는’ 게 아니라 ‘보고 찍는’ 것으로 바뀌고 ‘ ’ 그걸 하는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읽고 쓰는 걸 중심에 둔 사람들은 보고 찍는 게 중심인 사람들이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아이들 사이에서 느끼는 감정적인 혐오감과 이상함에 대해 이건가?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있었다. ‘일본의 대중문화비평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사 사토 다마키는 <폐인과 동인녀의 정신분석>에서 이것을 감정의 강도를 소통하고 공유하는 관계라고 말’한다고 한다. ‘의미를 공유하는 게 아니라 감정의 강도를 공유’하고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하는 핵심이 의미가 아니라 감동의 강도에’ 있다는 것이다.

동의가 되는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하는 핵심이 의미가 아니라 감동의 강도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경험해보지 못했고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쉽게 이해되지도 않았다. 머리로서 겨우 아,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딱, 그 정도였다. 내가 아이들을 이상하게 여기고, 지금의 영상세대에 대해 분리감을 느끼는 부분에 이어 책에서는 권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떤 텍스트로 평가를 하느냐는 권력의 문제예요. 제가 학생들에게 잘하는 말인데, 학생들이 개떡같이 이야기해도 가르치는 사람이 찰떡같이 알아듣는 거, 그거야말로 가르치는 자의 윤리입니다. 그런데 권력화 된 방식의 리터러시에서는 반대로 권력자들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을 문해력이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리터러시는 백성을 계몽하고 민주주의를 운용하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문화자본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권력을 공고히 하고 백성을 배제하는 방식이 됩니다.(중략) 리터러시란 무언가를 이해하고, 이해한 걸 바탕으로 어떤 행위, 즉 판단을 하거나 결정을 하거나 합의를 할 수 있는 능력이에요. 삶을 영위하고 관계를 풍성하게 만드는 역량인 거죠. 그런데 그걸 일종의 무기로 쓰려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와 그들, 더 심하게 말하면 나 빼고 다른 사람을 갈라버리죠. 그리고 그 선 밖에 있는 사람들을 근대적 의미로 인간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으로 밀어내버리는 무기로 사용하는 거죠.(중략) 리터러시가 이해를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하는데 배척하고 배제하는 장벽이 되어버린 거예요.(중략) 리터러시에서 중요한 것이 상호성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네가 말을 못 한다, 네가 글을 못 읽는다가 아니라 내가 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가 될 때에야 비로소 리터러시가 상호적인 것이 되고 서로가 성찰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귀를 기울이게 하고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힘쓰게 합니다. 그러지 않고, 내가 읽는 방식대로 읽지 않으면 너는 문맹이야, 난독증이야라고 하는 것은 관계를 짓는 일이 아니라 상대를 모욕하고 비인간화하는 일이에요’

얼마 전 읽은 정희진 샘의 인터뷰에서 정희진 샘은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아니라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의 연장선상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터러시의 차이 변화가 권력을 만들고 그로 인해 너는 아니야라고 말하며 누군가를 배제하게 되는 과정이 된다면 말이다.

리터러시뿐만 아니라 교육이라는 것 자체가 결국 앎의 문제일 뿐 아니라 앎을 다루는 것의 문제입니다. (중략) 말귀는 세계와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리터러시가 잘못 활용되면 그런 특권을 주게 되죠. 문해력이 ’ 나는 볼 수 있다. 나는 파악할 수 있다. 나의 해석은 정확하다 ‘며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자신에게만 권위를 부여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거예요. 리터러시가 글자와 단어의 사전적 의미만을 읽는 게 아니라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그게 바로 윤리가 발생하는, 그리고 윤리적 주체가 되어가는 지점이거든요. 왜냐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혹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바벨탑을 쌓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놓는 리터러시가 생기고, 또 어떤 다리를 놓을 것인가라는 관계 맺음의 코드를 알 수 있게 되니까요.(중략) 공정성에서 공공성으로 눈을 돌리는 게 지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힘든 사람과 이야기를 해서 그걸 기록으로 남기는 거예요. 구술사 프로젝트가 됐든 문화 기술지 프로젝트가 됐든, 그런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중략)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관계의 파탄에는 이 ’ 돌봄 역량‘의 문제가 깔려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것이,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는 거예요. 모르면서도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굽니다. 아는 것을 배려하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을 조심하는 것도 아니라, 다 안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문자 그대로 ’함부로‘대해요. 그러니 관계는 파탄이 나고 사람을 피하지 않을 수 없죠. 제가 리터러시에서 특히 말귀를 강조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말귀가 열려 있어야 돌볼 수 있고, 또 돌보는 와중에 말을 알아듣는 역량이 커지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게 내가 잘 모르는 사람 혹은 나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최소한 6개월 정도 같이 지내면서 그걸 기록해보는 거예요. (중략) 내 삶을 읽기 위해서라도 타자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하고, 타자의 삶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타자의 삶이 나의 삶과 다를 수 있다. 다르게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중략) 리터러시의 위기라는 게 있다면, 텍스트 자체의 질이나 양의 문제는 아닐 거고, 그걸 둘러싼 삶의 기쁨의 위기인 거 같아요. 리터러시가 기쁨으로 다가갈 수 있느냐, 그런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죠.

책은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를 중요하게 이야기하고 내가 모르는 타인의 삶에 대해 알아가기를 제안한다. 그를 위해 ‘내가 잘 모르는 사람 혹은 나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최소한 6개월 정도 같이 지내면서 그걸 기록’ 보자고 한다. ‘내 삶을 읽기 위해서라도 타자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하고, 타자의 삶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충분히 동의되고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지금 나의 머리에 떠올려보기만 해도 그렇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또 모르겠으나 현재 관계에서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떠올리면 그만큼 어려운 일은 없을 것 같다. 결국의 리터러시의 흐름, 변화에 따라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틀렸다’라고 하지 않는 것, 내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라고 인정할 수 있는 것,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의 시도가 중요하고 그 시도 혹은 교육의 과정은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이야 한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더 어렵다. 나는 아이들과 무엇을 어떻게 할까라는 온전한 나만의 과제가 주어진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헛헛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지만 뭔가 정리가 되는 것으로 안도감을 가져야 할까. 오늘은 우선 여기까지 정리하도록 하자. 그리고, 책의 마지막 엄기호 님이 쓰신 다음 단락을 되뇌어 본다. 그렇지. 힘든 일은 힘든 일이다.

사람은 좀처럼 자기 말의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자신의 정당성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말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생각을 무척 많이 해야 한다. 생각을 많이 하는 것만큼 피곤한 일이 없다. 피곤한 일을 피하며 자기 정당성을 흔들지 않기 위해 제일 좋은 일은 자기 말의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안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가르치는 일은 힘들고 배움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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