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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은낙타 Jun 06. 2020

내 자리는 내가 정할게요- 김지경



1. 쿨하고 싶었다.
대범하고 싶었다.
맞는 옷이 없으니 살 빼라는 말은 넘기고 싶었다.
“55는 바라지도 않으니 66까지만 만들자”는 후배의 구박도 신경 쓰지 않고 싶었다.
여성의 몸에 대한 억압을 멈추라! 날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상처 받았고, 모두 알 것이다. 상처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변절하고, 비뚤어지고, 이상해질 수 있는지.- <내 자리는 내가 정할게요> p19

서울대 나오나, 변호사를 하나, 사장을 하며 자기 일을 하나 여자는 다 똑같은 현실임을 들을 때 참 허무했다. 성폭력과 권력과 결혼과 출산과 육아 앞에 누구 하나 다를 것 없이 공감할 수 있었을 때, 그 공감대가 고맙고 연대할 수 있었음에도 더 이상 그런 상처와 고통으로 연대하고 싶지 않았다. 40대에 앵커 자리에 발탁된 김지경 님의 글 곳곳에서도 그런 반갑지 않은 공감을 본다. 앵커로 발탁되고 가장 먼저 한 고민이 내 몸에 맞는 옷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녀는 상처 받았다는 것. 나는 마지막 글에 주목했다. ‘모두 알 것이다. 상처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변절하고 비뚤어지는지 이상해질 수 있는지’ 맞다. 상처 받은 사람들은 쉽게 변절할 수 있는 유혹에 시달린다. 비뚤어지고 싶고 이상해지고 싶은 갈등에 사로잡힌다. 더 이상 상처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상처가 얼마나 아픈지 알기 때문이다. 생존 본능 아닌가. 생존하기 위해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수치심이 생기더라도 배신을 하더라도 그까짓 거라며 변절도 선택하고 비뚤어지고 이상해진다. 그녀의 솔직한 고백이 고마웠다. 고백하는 자는 유혹에서 어떤 선택을 할까.

2. “김 기자! 조직에서 또라이랑 의인이랑 한 끗 차이야. 조직이 하는 일마다 다 반대하면 미친놈이고, 별거 아닌 건 타협하다가 중요한 하나가 있을 때 맞서야 되는 거야”
그렇다면 이건 싸울 일인가 지나갈 일인가...... ‘사회에서 만난’ 사랑하는 자매들과 술자리에서 나눈 얘기도 생각난다. ‘우리 이기는 싸움을 하자’ - <같은 책>p40

얼마 전 한 강의에서 ‘정치와 일탈과 전복’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잠깐 설명해보자면 일탈은 내가 사는 구조를 망가뜨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시도하는 것이다. 전복은 내가 잡고 있던 혹은 만들어가던 것이 있다면 기초부터 무너뜨리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다른 것을 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며 나의 삶에 일탈은 무엇이고 전복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내가 일탈을 생각했다면 나는 지금 나의 현재를 더 유지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현재를 무너뜨릴 의지와 힘이 없는 것일까. 강의를 하던 분은 일탈과 전복을 고민하기보다 정치적인 선택을 하자는 이야기를 했다. 나를 위해 무엇이 더 필요하고 유리할지 고민하고 때에 맞춘 정치적인 판단과 선택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그러고 싶었다. 답답해서 혹은 화가 나서 나에게 유리한 것까지 망가뜨리는 것 말고 노련한 정치적 판단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김지경 앵커에게 또라이와 의인의 차이에 대해 알려준 여성 정치인도 그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패기로 뒤집어 업을 생각 말고 타협할 때 타협하며 정치적인 생존을 하자는.

3. “청각장애인은 듣는 능력이 기준점 이하인 사람들을 부르는 거고요, 농인은 수화를 사용하는 언어적, 문화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거예요. 전자는 병리학적 시선으로 외부에서 붙인 이름이고, 농인은 스스로 붙인 이름이죠. 영어에선 이 구분이 명확해서 전자를 deaf, 후자는 d를 대문자로 해서 Deaf라고 해요.”
(중략) 언어적, 문화적 소수자로 농인들을 보니 모든 게 명확해졌다. 귀가 들리는 다수의 관점에선 이들이 ‘장애인’이지만, 농인의 관점에선 자신들은 시각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고, ‘청인’들은 소리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농인들이 농사회에 있을 땐 전혀 문제 될 게 없지만, 그들을 이상하거나 부족한 존재로 보고, 또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룰만 강요하는 다수 청인들의 사회에서는 삶이 고통스럽고 불편해진다.
부끄럽게도 청인인 나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같은 책> p59

 이 부분을 읽으면서 김원영님의 <실격당한 자를 위한 변론>이 생각났다. ‘수화언어 사용자의 뇌- 이 엄청나게 복잡한 4차원적 구조, 수화의 신경학적 기반, 수화는 정말로 언어이다. 뇌 또한 수화를 언어로 대우하고 있다. 수화는 언어로서 뇌의 좌반구에서 처리됨. 공간적으로 조직되어 잇음에도 좌뇌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뇌의 일반적인 영역 구분과는 완전히 다른 ’언어‘영역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렇게 해서 수화 사용자들은 공간을 표현하는 새롭고 굉장하고 복잡한 방식을 발전시킨다. 이는 수화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는 유사한 공간을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종류의 공간이자 공식적인 공간이다.’ 비장애인인 나의 언어를 중심으로 나의 언어가 아닌 수화는 언어가 아닌 것으로 생각했다. 그저 언어가 없는 이들의 표현방식쯤으로 말이다. 무엇을 기준점으로 삼는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나의 것이 기준점이 될 때 내 것이 아닌 다른 것이 타자가 된다. 타자의 것은 내 것을 중심으로 삼은 후에만 가능해진다. 장애인에게 필요한 제도와 구조는 비장애인이 가지는 배려 차원이 아니다. 신체적, 정신으로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나름의 방식과 삶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차원의 것이 되어야 한다.  

4. 이상하다 싶어 그녀에게 연락해보니 오후 5시 뉴스가 새로 생기면서 그 프로그램의 토역을 맡았고 더 이상 토요일 새벽 뉴스는 수화 통역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방송사들이 수화통역을 규정상의 일정 비율만 채우면 되는 걸로 생각하는 것 같다던 그녀의 말이 떠올라 입 안이 썼다. <같은 책> p63

얼마 전 지인의 페북에서 수화 통역사의 화면이 시청에 방해가 된다며 수화 통역을 줄여달라는 민원을 봤다. 지금 우리 사회가 누군가의 언어가 내 눈에 방해가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회구나 싶었다. 수화 통역이 비율 규정이 있다는 것을 이 책을 보고 처음 알았다. 비율이 아닌 삶에 대한 이해가 절실하다.

5. 죽음에 대한 생각, 반은 농담이지만 반은 진심이다. 30~40대 워킹맘이 쓰러졌다는 얘기가 들릴 때마다 가슴이 덜컥한다. 최근 벌어진 사건들만 떠올려도 적지 않다. 재작년에는 마흔둘밖에 안 된 워킹 맘 고등법원 판사가 일요일에도 출근해 다음 날 새벽까지 판결문을 쓰고 퇴근해서 안방 화장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고, 문재인 대통령을 수행하던 외교부 국장도 현지에서 쓰러져서 의식을 찾지 못했다는 뉴스가 있었고 자녀 셋의 엄마인 30대 보건복지부 사무관은 직장 계단에서 심정지로 발견됐고...... 이들의 고통이 나의 것인 양, 이들이 겪는 일이 나의 미래인 양 가슴이 먹먹해진다. <같은 책> p78

알지 못하는 뉴스가 많다. 40대 50대 가장의 돌연사는 많이 봤지만, 워킹맘의 돌연사는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 내가 피해 간 걸까. 김지경 앵커 주변의 소식 만일까. 일부 여성의 문제가 여성 일반의 문제로 대두되고 여성 전체의 문제로 지탄받는 기사는 흔하다. 기사를 쓰는 기자인 김지경 앵커는 죽음에 대해 매일 생각한다고 한다.

5. 젖꼭지는 다들 있는데, 왜 남자는 드러내도 되고 여자는 가려야 하는 거지? 이 질문은 여성들이 일생동안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의문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왜 남자 아기는 고추를 드러내 놓고 사진을 찍고 여자 아기는 성기를 가리지? 가임기 여성에게 생리는 안 하는 게 오히려 문제인, 일상적인 일인데, 왜 ‘마법’ ‘그 기간’이라고 하면서 생리 중임을 숨기지? 생리대를 사면 왜 당연히 숨겨야 할 것처럼 검은 봉지에 넣어서 주는 거지? 왜 산무인과 진료는 ‘치료’인데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거지? 왜 성폭력 피해자가 꽃뱀으로 욕먹고 가해자는 사회에서 잘 살아남는 거지? 왜 아기가 태어나면 우선 아빠 성을 따르게 되는 거지? 이런 질문을 놓지 않고 자신의 답을 찾아내 말하는 여성들을 왜, 우리 사회는 그토록 못 견뎌하는 거지?
한국사회에서 자라온 ‘아줌마’로서 생리 얘기를 꺼내는 게 100 퍼센트 마음 편하진 않지만 또 하지 못할게 뭐 있나 싶다. 따지고 보면 “오늘 좀 두통이 있어서요”와 다를 게 뭐람.
그런데 “오늘 좀 컨디션 안 좋으신가 봐요?”라고 물었을 때 “네, 생리하고 있어서요”라고 답하면 j나 피디 선배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갑자기 왜 이렇게 훅”이라며 황당한 표정을 지을까, 아니면 요새 유행하는 “TMI”를 부르짖으며 머리를 쥐어뜯을까? 하하. 모르겠다. 그것은 또 그들의 몫 <같은 책> p145

아이들이 있는 공간에서 일하는 나는 남자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의 다른 신기한 세계를 본다. 남자아이들은 자신의 성기를 드러내지 못해 안달이다. 매일매일이 그러하다. 성기는 웃음을 주는 소재이기도 하고 화날 때 누군가를 공격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심심하면 서로의 성기를 공격하려 내세우고 만지려고도 한다. 여자 아이들은 자신의 성기의 이름을 말하지 못한다(않는다). 정확한 명칭을 알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냥 그들의 성기도 고추인 것이다. 성기를 지칭해야 할 어떤 상황이 생기면 민망해하고 부끄러워하고 다른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얘기한다. 그 아이들은 공교육을 받는 8살에서 12살의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은 언제 어떤 의문을 가지게 될까. 이 아이들은 왜 다르게 성장하고 있을까. 그것이 맞는 것이라서 그럴까.

남자들이 생리를 했다면 ‘생리는 아주 내세울만한 인간의 특별한 무엇’이 되었을 것이라는 문장을 본 적이 있다. 아쉽게도 어디에서 누가 한 말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읽었을 때 뭔가 뒤통수를 맞은 듯한 동의가 되었다. 생리에 대한 의학적 연구도 지금과 같이 미지의 세계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리를 둘러싼 한 인간의 문제가 ‘당연히 짊어져야 할 아파해야 할 무엇’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몸의 문제를 모르고 살았다.

6. 책을 읽으며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고, 김지경 님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그냥 뻔한 아줌마 이야기가 아니길 바랬다. 내가 공감할 것이 딱이 없어도 좋겠다 싶었다. 그게 더 좋을 것이다. 나와는 다른 사람은 좀 다르게 사는 게 제대로 된 사회 아닌가. 좀 다른 부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생애 주기가 버무려져 있다. 앵커 1년을 지낸 김지경 님이 얼마를 버틸지는 모른다. 버티지 않아도 좋다. 그 자리에 없다고 김지경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주 6일을 밤낮없이 일하는 삶이 멈추기를 바란다. 버티는 삶만이 살아남는다면 나의 생존도 힘들어질 것 같다. 같이 숨 쉬며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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