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고
나이지리아 언어가 낯설었다. 언어가 낯서니 소설 속 음식 이름, 음식 재료 이름, 사람 이름, 호칭, 모두가 어려웠다. 누가 누구를 부르는지 지명인지 사람 이름인지 생각하다 몇 가지는 기록을 하다가 읽었다. 그러다 보니 이것저것 모르는 채로 조금씩 읽히기 시작했다. 무슨 내용일까 그렇게 읽어가다가 p47에 이르러 미리 예상하지 못하고 준비하지 못한 충격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소설을 읽고 있는 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소설 속 캄빌리가 왜 그렇게 사물과 인물의 관찰(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관찰, 상황을 살피는 관찰)에 긴장을 놓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정물처럼 보일 것 같은 풍경을 그릴 때도 왜 그렇게 아슬아슬함과 외줄을 타는 듯한 두려움이 깔려 있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소설을 이어가기 힘들었다. p47에서 멈추었다. 그러고는 며칠이 지나 다시 이어갔다. 내용을 예측하거나 상상하거나 그리고 있었다면 충격이 덜했을까.
두려움과 긴장 속에 읽었던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마치고 아래 대목을 찾아 다시 읽었다. 왜 그랬을까. 소설 속 캄빌리의 마음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나 보다. 희미하게 그려졌던 캄빌리와 오빠와 어머니의 풍경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싶었나 보다. 잘 보이지 않는 길을 더듬더듬 걷던 것에서 벗어나 캄빌리와 오빠와 어머니의 일상의 무게감과 의미를 좀 더 알고 느끼고 싶었다.
어쩌면 어머니는 자신에게 도자기 인형이 더 이상 필요치 않으리란 걸, 아버지가 오빠를 향해 미사 경본을 던졌을 때 인형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쏟아져 내렸음을 이미 깨달았는지는 몰랐다. 반면에 나는 그제야 겨우 깨닫고 있었다. 이제 막 생각을 그리로 돌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방을 나가고 나서 침대에 누워 과거를, 오빠와 어머니와 내가 입술보다 마음으로 이야기할 때가 더 많았던 세월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은수카가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것이 은수카에서 시작됐다. 이페오마 고모의 은수카 집 베란다 앞에 있는 작은 정원이 침묵을 밀어내기 시작하면서. 지금 내게 오빠의 반항은 이페오마 고모의 실험적인 보라색 히비스커스처럼 느껴졌다. 희귀하며 향기로우며 자유라는 함의를 품은. 쿠데타 이후에 정부 광장에서 녹색 잎을 흔들던 군중이 외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자유.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
하지만 내 기억은 은수카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그 전, 우리 앞마당의 모든 히비스커스 꽃이 눈부시게 선명한 빨간색이었을 때에서 시작되었다. - <보라색 히비스커스> p27
붉은색으로만 알았던 히비스커스의 보라색 존재는 어떤 것일까. 절대 알 수 없는 것, 할 수 없는 것, 해서는 안될 것,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가 있다는 것, 가능하다는 것, 그래야 한다는 것.
캄빌리와 오빠에게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알게 해 주었던 이페오마 ‘고모의 속삭임은 꼭 자기 자신 같았다. 크고, 활기차고, 겁 없고, 시끄럽고, 허풍스러웠다.’p123 글을 읽으면서 캄빌리의 집과 이페오마 고모의 집을 상상해보곤 했다. 그들이 간혹 음식 만들고 먹는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졸로프밥, 아주, 응궈응궈, 옥파, 밤바라땅콩, 야자유, 아기디, 말티나, 본비타, 푸푸, 코코얌, 오누그부, 오라, 플랜틴, 옥수수, 우베, 참마, 아쿠, 우구
소설 속 그들의 삶을 따라가기는 쉽지 않았다. 다만, 히비스커스와 익소라 꽃이 있는 풍경과 나이지리아 어느 집과 그 곳에서 살아가던 캄빌리와 자자, 어머니, 은누쿠 그보, 시시, 친웨, 아마디 신부, 아마카, 오비오라, 치마, 마마 조, 비어트리스 숙모, 이페디오라 만이 희미하게 그려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