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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은낙타 May 23. 2021

김예림 <그을린 얼굴로 웃기가 왜 이렇게 어렵지>

-‘나는 단지 견디고 있는 걸까 ‘








1. 낡음을 인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 왠지 울적하고 기운 빠지니까 안 그래도 힘 빠지는 날에 나의 존재까지 그렇게 말하는 건 서글프니까. 웬만하면 건드리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결국은 빙글빙글 돌아와서는 그렇구나라고 인정하게 되는 한 가지.



‘나는 이제 낡았구나. 한 때 빛났던 나는 이제 묵은 먼지 투성이구나’라는 것. 예림의 글을 읽으면서도 또 한 번 그걸 느낀다. 내가 애처로을까봐. 나를 보는 측은한 눈길 따위 거두어들여야겠다 생각한다. ‘아. 미련 갖지 말아야지, 묵은 먼지 쌓인 나에게 미련 갖지 말아야지. 이제는 예림과 예림의 세대들이 생산하는 글과 작업을 양껏 찾아봐야지’ 이 책은 내가 지금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세대에 대한 이야기이며 내가 ‘선 자리에서 바라본 세상을 서둘러 적’고 함께 ‘증언’ 해야 할 이유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2. 예림은 성인이 되고 대학을 가지 않았다. 나고 자란 곳을 떠나 부모의 곁을 떠나 독립을 한다. 지방 농촌에 기반한 잡지 기사로 취업을 했다. 대학을 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우리나라에서, 젊은 사람이, 여성이, 지방의 소도시 농촌에서 기자로 일한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지역의 할머니, 아주머니, 아저씨들을 만나고 인터뷰하고 매달 마지막 주 퇴사를 고민하고 자괴감에 시달리던 밤에 예림은 특별한 책 읽기와 말하기를 한다.  



벨 훅스의 페미니즘 정의 ‘성차별에 의한 모든 폭력과 억압을 종식하는 것’이라는 말에 이끌려 ‘아주 작은 페미니즘 학교 탱자’에 입학했다는 그는 매주 한 권씩 책을 읽고 한 달에 한 번씩 동영상 강의를 시청하고 에세이를 작성하는 일을 한다. 퇴근 후 내려오는 눈꺼풀을 일으킨 사람들, 예림은 책을 읽으며 그 시대의 여성들을 상상하고 자신의 삶과 존재를 증언한 누군가를 떠올리고 저자의 말을 ‘복기’하는 밤이 늘었다고 했다.



나는 무엇보다 글의 면면에 흐르는 그의 ‘우정’이 좋았다. 예림은 글에는 엄마에게서 아빠에게서 지인들에게서 받은 ‘다정함’에 대한 여러 번의 언급이 나온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표현과 닮은꼴로 그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는 좋았다. 그 시선 아래 있다면 한의원의 물리치료실 적외선 치료기처럼 늘 은은하고 따뜻하고 다정한 빛이 비칠 것만 같아 보였다.



3. ‘웃기지 않아도 웃는’ 자신을 보면서 ‘견디기 위해 견디는 게 아’ 닌데, 우리는 ‘정말 웃길 때만 웃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는’ 것일 거라는 예림의 담담하면서도 단단한 독백을 읽는다. 예림의 생활 전반에 깔린 아름다움, 노동, 존재, 가치, 돈, 육식, 정치, 권력, 계급, 성에 대한 질문은 쉽지 않았던 그의 직장 생활을 느낄 수 있게 하고 땀의 시간을 볼 수 있게 한다.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붙들고 침대에 누워 내 가치를 가늠해보았다. 내 가치를 재단하는 사회적 기준이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에 이르자 이대로 잠들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출근해 같은 지적은 받고, 무엇이 잘못된 건지 막연히 고민하는 대신 새로운 기준을 배우고 싶었다. 벌떡 일어나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를 펼치자 1980년 미국에서 같은 고민을 하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책 p87



예림은 ‘혁명을 모른다’고 했지만, 이미 혁명을 선택한 것 같다. ‘새로운 기준’을 배우고 싶다는 예림은 누구를 따라 하기보다는 스스로 찾기를 선택했다. 스스로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그 질문의 길에 필요한 돈을 주거를 사회가 제도적으로 받쳐줘야 할 텐데. ‘나이 든 농민운동가의 고매한 이야기를 듣다가 저절로 하품이 나왔다’는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뜨끔 했다. ‘늘 같은 이야기를 늘 같은 방식으로 들려주는 탓에 와닿지 않았’고 ‘다음 세대를 키워놓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운동은 연속성을 얻지 못한 게 아닌가. 달라진 시대에 따른 새로운 언어를 얻지 못한 게 아닌가’라는 예림의 질문에 나는 공손히 마음속으로 ‘예’라고만 대답했다. 허튼 방해가 되지는 말아야 할 텐데. 예림의 책을 읽은 건 참 잘한 일이다. 겉표지의 말 ‘내가 선 자리에서 페미니즘 이어 말하기’에 나도 함께 대꾸하고 싶어졌다.




‘    ‘ 속 문장은 책 속 문장 인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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