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길 <음복>을 읽고
1. k의 무지함에 답답하고 힘들었던 내가 떠올랐다. k는 어디를 다녀오면 누군가를 만나고 들어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잘 만났어?”
“응”
그러곤 끝이었다. 반면 나는 누군가 만나고 들어오면 오늘 만났던 누군가에 대해 혹은 그와 얽힌 어떤 일에 대해 어떤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를 갈망했다. 누군가와 나누었던 것, 내가 생각했던 것, 내가 더 고민하고 싶은 것, 잘 모르겠던 것들에 대해 다른 누구가 아닌 k와 더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 날이면 더 말이 많아졌다.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느낀 건 이야기를 나누는 충만함이 아니었다. 혼자서 썰을 풀어놓고 내 것만 양껏 내어놓고 먹이는 기분이랄까? 그래,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내가 느낀 건 빼앗기는 기분이었다. 내 것을 빼앗기는 기분. 내 만남과 내 생각과 고민을 빼앗기는 기분.
“자기도 말 좀 해라”
“남자들은 만나면 뭐하냐, 아무 말도 안 하냐?”
묵묵부답인 k에게 이런 말을 던졌을 때도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부터 지금까지 성능 좋은 분무기로 날아오는 구름 같은 물방울처럼 나는 그렇게 젖어갔다. 자책에 젖어갔고, 실망에 젖어갔고, 무기력에 젖어갔고, 분노에 젖어갔다.
2.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믿고 싶지 않았다. 나의 이성을 믿지 않았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 ‘모르는 것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세나의 마음처럼 나의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이제 나는 더 이상 묻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모르는 것’은 정말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알게 된 나와 k의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스릴도 로맨틱도 낭만도 재미도 없다. 어느 정도 인생을 산 사람들이 된 나와 k는 각자의 인생에서 각자의 시간과 그에 따른 자신의 얼굴을 받아들이기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다. k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다. k에게 매달리지 않아도 육아는 이제 더 이상 나를 힘들게 하지 않고 k에게 매달리기보다는 나에게 중요한 또 다른 것 때문에 나의 현재는 이미 쉽지 않다. k와 함께 하는 인생이 우리의 처음이 그랬던 것처럼 풍요로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인생은 나에게 없다. k의 무지를 두고 나는 무엇을 할까.
3. 몇 주 전 k의 부모님을 뵙고 왔다. 어버이날이기도 했고, 엄마 아빠를 보고 싶었고, 가는 길에 보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같으면 갈 생각도 없었을 텐데, 어버이날이라는 이름이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p는 나에게 병의 진단과 진료, 속상한 마음과 앞으로의 불안에 대해 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전화를 하던, 얼굴을 보던 k와 나는 알게 되는 정보가 다르다. p는 아들인 k에게는 ‘아무 말하지 말라’는 말을 종종 하곤 했다. k에게 아무 말하지 않기 위해 나에게 그 많은 말을 해야 했을까. k가 듣지 않아야 할 말, 모르고 살아야 할 말은 무엇일까.
4. 할머니가 말했다.
“삼 년을 기다렸어”
“알지”
고모가 대답했다.
“죽을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데”
고모가 지겹다는 듯 대답했다.
“아이고, 엄마, 다 지나간 일이에요”
지나간 일?
잠깐, 드라마로 착각하는 거라고 하지 않았어?
나는 남편을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토마토 고기찜을 먹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내게는 할머니와 고모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내가 온종일 밥을 했어. 온종일”
“응. 그랬지”
“먹지를 않아”
“응”
“이상한 것만 먹으려고 해”
“알지”
“왔는데..... 돌아오지를 않아”
그리고 할머니가 나를 다시 쳐다보았다. 나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곧 알아차렸다. 그녀가 보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옆으로 기울어졌던 것이다. 그래. 처음부터 내가 아니었다. 그 사람이었다. 내내 그 사람을 보고 있었다. 화는 내며 숟가락을 던진 사람. 죽을까 봐 마음을 졸이며 삼 년을 기다린 사람. 살아 돌아와서 일 년 동안 집에 처박혀 있던 사람. 아내가 매일 출근하며 차려놓은 밥상엔 손도 대지 않은 사람. - 강화길 <음복> p30
집안의 모든 사람이 정확히는 모든 여성들이 알고 있는 집안의 흐름을 전혀 모르고 있던 사람. 소설 속 세나는 결혼 후 첫제사 자리에서 그것을 알게 된다. 첫제사 자리에서 가족의 외부인인 그가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을 함께 산 남편은 계속 모르고 살았다. 고모에 대해서, 엄마에 대해서, 아빠에 대해서, 할아버지에 대해서, 할머니에 대해서, 남편은 무엇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있었나. 가부장제 속에서 그의 엄마는 ‘정우에게는 모르게 해 줘’라고 한다. 그런 그의 돌봄은 세나에게까지 이어진다. 세나는 남편에게 말하지 않기로 한다. 그것은 정녕 사랑일까.
5. 나 또한 k를 사랑했다. 살면서 나는 그를 사랑해서 그에게 설명했다. 내가 들은 것을 그에게 옮겼다. 내가 아니라 그가 p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지금 p는 k를 여전히 자신이 돌보아야 할 사람으로 안다. k 또한 거부하지 않는다. p가 정한 포지션대로 살뿐이다. p는 나에게 할 말과 k에게 할 말을 정확히 구분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 구분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p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고 마음 아파하고, 챙기며 살 수가 없다. 그동안 많은 것을 챙기지 않고 살고 있음에도 p는 아직 나를 놓지 못한다. 어쩌랴.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 없다.
무지는 그것 그대로 삶이 되었다. 강화길 작가가 말한 ‘시시하지만 무서운 것들’은 그래서 중요하다. 삶이 되어 우리 몸에 속속들이 박힌 것들을 드러내는 것만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k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이것은 누가 정해줄 수가 없다. 각자의 선택이고 각자의 삶이다. 시시한 것들이 결국 시시해질지 슬퍼질지 무서워질지 반전을 일으킬지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설을 쓸 때 여전히 구상노트를 쓴다. 쓰지 못할 장면들을 계속 쓴다. 날것의 어떤 감정들,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절대 알 수 없을 어떤 것들, 시시하지만 무서운 것들. 경험들. 목소리들. 그것을을 자유롭게 적고 직시하는 과정이 있어야, 그것들을 모두 무너뜨려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강화길 <음복> 작가노트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