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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은낙타 Dec 17. 2021

잔소리



1.

여름에는 매일 세탁기를 돌려 냄새나

돌리고 나면 잊지 말고 건조기를 돌려야해

세탁기 열어놔

아침에 창문 좀 열고

건조기 먼지통 좀 털고

음식물 확인하고

아. 쓰레기 좀 버려라

설거지 좀 바로 바로 해라

설거지하고 행주는 빨아야지

빨고 좀 널어라

그릇만 씻는다고 설거지가 아니야, 통은 닦니?

설거지를 하기 싫으면 먹지를 마.

요 바로 좀 펴라. 난 요랑 매트랑 흐트러지는게 너무 싫어.

탁자 좀 치워라

소리 좀 줄여

이어폰 좀 꽂고 들어

학습지 했니?

채점 했니?

지금 뭐하냐!

불 좀 꺼라

왜 맨날 묻니, 스스로 해결해

그것도 몰라?


그동안 세상에 존재하는 잔소리란 잔소리는 다 해보지 않았을까. 이건 요즘 내가 하고 있는 잔소리의 극히 일부, 세발의 피다. 모두 옮겨적는다면 음…..사진까지 첨부해서 시간별 영역별로 써야하지 않을까 싶다. 잔소리는 나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나는 언제부터 이런 모습이었을까 가끔 생각한다. 잔소리가 빠진 나는 뭘까. 나는 나에게 잔소리를 해댈까. 한 때 잔소리를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내가, 내 삶이 측은했던 적이 있다.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모두를 어그러뜨리고 남루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그래서 그런 나를 위해 결심했었다. TV에서나 나올 법한 갈림길의 선택 그래! 결심했어! 인생극장을 찍는 양 심오하게 진지하게. 잔소리 없이 살기로. 잔소리 없이 살기 가능할까.




2.

잔소리- 다음 어학사전 펌

1.듣기 싫게 필요 이상으로 참견하거나 꾸중하며 말함 2.쓸데없이 자질구레한 말을 늘어놓음


이런! 잔소리란게 얼마나 필요한 말인데 쓸데없이 자질구레하데? 사전이라는 것하고는 오늘 따라 참 답답하네 싶다. 잔소리란 자고로 너무 필요한데 누가 꽉 붙들어주지 않으면 안되는 자잘한 것들이다. 스스로 꽉 붙들 수 있는 DNA라도 타고 났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사람이면 누구나 다 하나씩 떨어트리고 태어나는 바람에 평생 잔소리를 듣는다. 나 아닌 타인을 통해 매일 배운다는 것이다. 배운다는 표현은 좀 아닌가? 주입받다가, 매 맞다가, 모욕 당하다가, 귀에 생긴 딱지를 떼다 떼다 까먹었다 싶을 때까지 계속 되는. 나는 오늘도 G에게 그런 잔소리를 해댔었다.


네가 할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거 아니니?

왜 매번 말하는데 안되는거니?

까먹으면 알람을 맞춰두던가, 방법을 찾아야할거 아니야. 왜 매번 까먹었네야! 그게 뭔말이야!


입을 딱 막히게 했다. 두말 못하게. 그러고 나서야 한발 물러선다. 나의 잔소리는 나 말하기에서 시작하여 ***대화를 거치고 ***정의를 돌아 돌아 먼길을 돌아서인지 상대에게 쐐기를 박는게 한국양궁보다 더더욱 정확해져 버렸다. 말할 숨조차 없을 것이다. 오늘 할 일을 다 하지 않은 너에게 줄 그 따위 공기는 내가 다 먹어버리겠어. 빌런도 이런 빌런이 없지. 이래뵈도 이 타이밍은 빌런이 스스로 ‘아차’하는 반성 타이밍이다.





3.

그렇게 나는 우리집에서 빌런으로 존재한다. 빌런인 나의 인생극장은 어찌 되었을까. 나를 포함한 인간들은 무지하여 그걸 또 가능하게 만들었었다. 뭐든지 이해하려 들고 공감하려 들던 때 나의 인생극장에는 연출도 시나리오도 없었다. 힘들어 헉헉대며 뭐라도 했어야했던 내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누구도 아닌 내 몸 속에 애궃은 ‘잔소리없이살기기념사리’ 하나 늘이고 나서야 정말 쓸데없는 나에 대한 측은지심을 버렸다. 후회없이.


여전히 나는 잔소리하는 인간이다. 빌런이다. 여왕벌이다. G와 H는 어느 날 나를 혼자만 로얄젤리를 먹는 여왕벌이라 했다가, 어느 날에는 ‘어머니는 시끄러운게 싫다고 하셨어, 어머니는 선풍기 바람이 싫다고 하셨어’ 수만가지 노래를 지어 부르며 내 취향을 노골적으로 모욕하고 놀린다. 무려 내 잔소리를 흉내내며 여왕벌 ‘어머니’를 코스프레하며 논다. 잔소리쟁이는 빌런이었다가 여왕벌이었다가 금새 자기 할일을 끝내고 위풍당당해진 일벌들에게 너덜너덜 놀림감이 된다. 다행이다. 누구의 놀림감이 될 수 있어서. 혼자만 빌런이 아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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