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야기

결혼의 땀과 눈물

by 붉은낙타



<결혼이야기>는 영화관에서 보고 싶었다. 나는 ‘영화는 영화관에서’주의다. 집에 식구들이 많아 집중이 되지 않아서였을까. 혼자 좋은 스피커 소리 들으며 어두운 영화관에서 영화보기를 즐긴다. 영화관에서 보려고 그동안 칼럼 등에서 결혼이야기가 언급된 글을 피하며 지냈다. 보고 싶은 영화는 보기 전에 관련된 정보를 최대한 차단한다. 보고 싶은 영화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아무 정보없이 깜깜한 영화관에 홀로 앉아 영화를 맞이하는 일은 짜릿하다. 그리고, 그렇게 맞은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감동을 준다.

다리가 아픈지 10일이 지나고 아직 통증은 여전하다. 디스크가 터졌다니 앞으로 통증을 잡더라도 시일이 걸릴 것이다. 조만간 영화관을 가기는 힘들다는 말이다. 집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집이 답답해졌다. 이걸 해도 저걸 해도 물속에 잠긴 듯 숨쉬기가 힘들다. 그렇게 무심결에 <결혼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찰리 역의 아담드라이버는 패터슨을 봤는데도 같은 인물인지 몰랐고, 그 유명하다는 니콜 역의 스칼렛 요한슨도 처음보는 사람인 듯했다. 아담드라이버와 스칼렛요한슨은 배우가 아닌 듯 찰리와 니콜 그 자체였다. 어디선가 살고 있는 사람으로 서 있었다. 영화의 시작은 니콜과 찰리가 상대의 장점을 적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미국은 조정기간 이런 과정이 있나보다. 찰리와 달리 니콜은 내용도 마음에 들지 않고, 하고 싶지 않다며 나가버린다. 이렇게 영화는 이혼을 하기 위한 처음을 연다.

영화 보는 내내 나는 니콜이 되었다. 니콜이 되어 니콜의 눈물을 이해했다. 니콜은 나처럼 울었다. 왜 그럴까. 백인의 다른 문화 속에 사는 니콜이 왜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으며 왜 이해받지 못하는 문제로, 왜 홀로 눈물을 흘릴까. 일본 사회학자 우에노치즈코는 부부관계를 말하며, “관계를 포기한 여자와 관계에 둔감한 남자의 조합”이라고 말한바 있다. 니콜은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찰리를 거부했다. 그러면서 영화 속 이혼은 시작되었다. 니콜은 찰리와의 관계를 끊고자 했으며, 그 대신 자신의 일과 미래를 선택했다. 영화는 니콜이 왜 이혼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이혼의 과정을 통해 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절박한 니콜과 달리 찰리에게는 이혼의 이유가 그다지 나타나지 않는다. 니콜의 이혼의 이유에 대해서도 ‘찰리는 모르더라고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애초부터 찰리에게는 이혼의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찰리 혹은 남성에게 부부란, 관계란 그런게 아닐까. 아주 수동적인. 그냥 이도 저도 아닌. 이혼할 고민의 시간조차 없는. 삶의 중요도, 우선순위에 있지 못하는. 찰리는 영화내내 니콜이 원하는대로 해주겠다고 한다. 그리고는 자기 일을 하느라 이혼의 절차를 밟기엔 시간이 나지 않는다. 니콜에게 소송을 당하고서야 자기 일을 멈추고 이혼 절차에 집중한다.

니콜은 찰리를 처음 만났을 때 찰리를 통해 자신의 생명을 되찾았다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사랑은 그렇게 다가왔다. 말할수 없이 아름다운 사랑이었다. 아래 니콜의 대사를 보면 그려질 것이다. (니콜은 연기자고, 찰리는 연극감독이다.)

“그가 나에게 말을 걸었고,
난 대답했죠“

“내 일부는 죽은게 아니라 잠들어 있었어요”

“대화가 섹스 같았고
섹스가 대화 같았어요.
내가 떠나지 않았어요“
(중략)

“난 계속 찰리와 그의 인생에
맞춰 살았어요“

“그만큼 좋았고
살아있는 기분이었거든요“

“특별한 사람이라
관객들이 날 보러 온다고 느꼈어요“

“근데, 난 잊혀갔고,,,,,,”
“그리고, 난”
“한때 잘나갔던 반짝스타로 남았어요”

“내가 살아난게 아니라,
찰리에게 생기를 더해줬던 거죠“

(중략)

“찰리는 그걸 비웃고
샘을 냈어요“

“그걸 극단 예산으로 쓰자는 거예요”
“그때 확실히 깨달았죠”

“찰리는 나를 인정하지 않는구나”
“자기와 별개인 독립적 인격체로요.”

“근데, 찰리는 모르더라고요”

영화 속에는 찰리와 니콜의 아름다운 사랑이 있고, 결합이 있고, 아이의 탄생, 육아의 과정이 있다. 그 속에 찰리와 니콜의 변화, 시간이 흐르고 니콜에게 남은 것,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들. 영화 속 아담드라이버와 스칼렛요한슨은 찰리, 니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딱 그만큼의 인물이 되어 영화 속에서 살았다. 나는 무엇보다 영화 속 니콜이 너무 아름다웠다. 영화 내내 독백하듯 말하는 그녀의 고백이 아름다웠고, 그녀의 선택이 아름다웠다. 그 선택을 하기까지의 지난 날의 슬픔, 더 이상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현재도 아름다웠다.

니콜은 이혼을 하고 자신이 살고 싶었던 LA에서 배우의 생활을 다시 시작한다. 쉽지 않았을텐데, 두려움도 있었을텐데, 그녀 말마따나 그녀는 이제 그냥 반짝스타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녀는 그 길을 선택했다. 대사가 길고, 많은 이 영화 속에는 웃음을 주는 여러 요소들이 많다. 2시간이 훌쩍 넘는 영화를 지겹지 않게 본 이유가 될 것이다. 어떤 것이 웃음을 주었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지만, 나는 영화 속 그녀의 어머니를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끝내 찰리의 변호사까지 소개해주는 즐거운 엄마. 미워할수 없는 어머니다.

영화의 마지막 무렵 찰리의 노래는 가슴에서 나오는 노래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가사의 내용이 가슴에 박힐 것이다. 이슬아의 칼럼에서도 소개된바 있다. 이슬아는 이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접속사 없이 말하는 사랑’을 말했다. 역시 이슬아다 싶었다. 접속사 없이 어떻게 글을 쓴담? ㅎ 난 그 칼럼을 읽으면 ‘그렇구나 난 많이 멀었구나’ 했다. 이 노래가 영혼에 와 닿는건, 접속사가 필요없는 진심의 힘일까. 세월의 힘일까. 깨달음의 힘일까. 지나감의 힘일까.

정희진은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전통적으로 성과 사랑의 주체는 남성이지만,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은 여성이 담당한다. 여성이 노동을 그만두는 순간, 대부분의 관계도 끝난다”고 하였다. 찰리의 가슴을 후비는 노래와 함께 마지막 장면에서 기억나는 한구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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