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시간, 경험은 언제나 돈보다 값지더라
어학연수 비자는 과정도 까다롭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여러 돌발상황에 대비하기 쉽지 않은 편이다. 급하게 출국해야 하거나. 기간을 채우지 못하게 되었을 때 큰 위험 - 돈 낭비, 신뢰문제 등-을 감수해야 하는 리스크가 있다.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기 싫었던 내가 택한 하나의 방법이 바로 워홀이었다. 물론 지내다보 니 돈이 궁해서 파트타임 잡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내 목표는 공부였지 통장 잔고가 아니었다. 다만 먹는 것을 줄이고 좀 덜 놀면 더 오래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에선 구두쇠같이 굴기도 했다. 솔직히 좀 갑갑하게 굴었다. 일하면 충분히 여유롭게 지낼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좀 부끄럽긴 하지만 일하던 것을 그만두고 그다음 시험에서 진급해서 가장 높은 반에서 졸업했으니, 후회는 없다.
나는 워홀이 어떻냐 물어보면 잘 모른다. 술도 안 하고 파티도 안 가고 외식은 어쩌다 한 번씩, 대부분은 주로 집에서 해 먹고, 우리집으로 남을 초대하기만 해봐서 외국 문화라는 것에 감흥이 없었다. 사실 원래는 술을 좀 즐기는 편에 가까웠고, 작년에 마신 와인 병 수나 소주 병 길이가 꽤 되는데, 스트레스 없고 돈도 없는 상황에 술을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물론 외로운 날도 많았다. 근데 그 외로움이 혼자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마음 먹어도 바뀌지 않는 상황'에 대한 불만에 가까웠기 때문에 생각이 많아질 수록 오히려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노력했다. 외동이라 혼자 자란 것도 한 몫한 것 같긴 한데, 그건 큰 부분은 아니었고, 그냥 혼자 지내는 게 체질인 사람이라 술, 친구, 파티 없는 전형적인 동양인 여자애로 지내는 것에 불만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한인 사회에 있었던 것 도 아니라 회색지대에서 어찌저찌 지내다 온 사람이 되었다. 아쉽냐 물어보면 전혀 아닌데, 노력하지 않으면 살던 대로 살게 된다는 게 원지알게 되었다. 내 평온한 일상을 지키고, 루틴을 지키다가 새로운도 전도 해보고, 가끔은 한국이 그립다가 만족하다가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서 어느날 문득. 나 이제 돌아가도 될 것 같네, 하고 생각했다.
워킹홀리데이로 해외에 나가있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한국사회의 뒷같은 점을 겪어보고 나온 사회 초년생이라면 죽어도 여기서 죽겠다, 내지는 한국이나 여기나 비숫하게 거지같다면 차라리 돈이라도 많이 벌고, 외부인으로서 누릴수 있는 자유 -나이에 대한 스테레오, 사회 구성원으로서 겪는 압박으로부터의 자유- 라도 누리며 지내겠다는 이야기이다. 내가 보기에 이건 어느정도 맞는 얘기 같다. 내가 뉴질랜드에서 만난 사람들은 보통 졸업 이후 취업을 준비하다가 문턱을 넘지 못하고 떠나 온 어학연수 도중 비자를 전환하여 남게 된 사람, 첫 직장에서 일하다 보니 내 길은 이곳이 아니다 싶어서 다른 길을 찾게 되었다는 사람, 그것도 아니라면 유학생들이 었다. 개중에 유학생을 빼놓고 나면 남는 사람들은, 내 또래 사람들은 전부 25살 이상이었다. 나보다 사회 경험도 많고 다시 돌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돌아가더라도 전과 같은 삶은 살지 않겠다는 사람이 많은 게 카더라와 유일하게 다른 점이랄까.
뉴질랜드에서 레지던스가 아닌 임시비자 -영주권, 시민권을 제외한 비자- 로 지내는 사람들 대부분 호주에서 3년을 보내고 더 이상 비자 연장이 안 되자 뉴질랜드로 건너 온 사람들이었다. 현지에 가족이 있거나 유학생인 경우를 제외하면 친해진 워홀 유럽, 남미 친구들은 전부비자가 끝나는 날 뉴질랜드에서 번 돈을가지고 아시아 어느 나라 여행을 떠나서 그곳에서 여유롭고 풍족한 삶을 만끽했고, 한 달 단기 어학연수로 온 일본인 친구들은 각각 대학 졸업과 입사를 위해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태국인 친구들은 늘 비자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중 국인 친구들은 대개 대학 경영학과로, 나의 작고 소중한, 몇 안 되는 한국인 친구들만 내 곁에 남아서 나와 함께 미래 걱정을 했다. 사실 한국인들도 워홀로 뉴질랜드에 오면 공부는 뒷전, 전부 일하고 술마시느라 바쁘다. 나는 총 19주 동안 학원을 다녔는데, 한국인들은 방학 시즌에 학교 연계 단기 어학연수가 아니면 찾기 힘들 정도로 귀했다. 그래서 워홀이라는 제도에 강한 선입견이 생긴 것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실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래서 어느정도 적응하게 된 이후에는 아무나 눈 마주치는 사람이 아니라 성실히 일하고 꾸준히 뭔갈 배우는 사람들에게 끌려서 함께 어울렸던 것 같다.
근데 술마시고 노는 사람들 중에 가장 조용한 사람이 한국인이다. 웃기게도 아무리 왈가닥 한국인이라도 복작복작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민족사이에 끼면 한 줌 동양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학원 라운지 파티도 단순 과자파티가 아니라 클럽이었다. 학원 시험 주기에 맞춰 서너 달에 한 번씩 있던 라운지 파티에서는 다문화를 표방 한 먹고 마시는 행사가 열리는데, 머리카락이 꼬불거리거나 바지가 얼룩말 무늬거나 걸을 때마다 또각거리는 신발을 신은 사람들 옆에서 그냥 듣기도 힘든 영어를 음악 사이에서 파해처 듣다 보면 나도 어느 새 어른이 된 것 같다가도 명절에 어른들 사이에 낀 아이가 된 것 같기 도 했다. 그래도 학원에서 사귀는 친구들은 참 정갈하고 배움의 의지가있는 학생들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워홀이 내게 안 맞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처음으로 파트타임 잡을 구했을 때였다. 나는 6월이 다 돼서야 정식으로 일을 구하고 실제로 급여를 받았으니, 비자와 관계 없이 그냥 '일을 늦게 시작한 편'에 속한다. 집 값으로만 주에 20만원이 넘게 나가는데. 대충 잡아도 한 달에 100은 그냥 쓰는 동네에서 학원까지 다니며 일 없이 지내기엔 벅찼다. 아무리 돈쓰러 온 워홀이여도 과한 지출로 허리띠를 17인치까지 졸라 랜 기분이었다. 그래서 구한 잡은 테이크어웨이와 배달 전문 재팬-코리안 식당이었다. 개나소나 일식집을 여는 동네에서 유난히 잘 되는 가게였는데, 정말 저녁부터 마감까지 4시간, 그것도 월화 휴무로 쓰는 가게라서 바쁜 날, 바쁜 시간에 마감까지 해야 하는 '한국인 사장'스러운 일이었다. 급해서 대충 <생활비 벌 만큼 일하고, 최저 잘 주고, 2일은 쉴 수 있는 일>을 기준으로 잡는 바람에 뜬금 없이 밤 10시에 유흥가를 지나는 최악의 퇴근을 수락하게 되었지만 당시엔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뭘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면 빨리 해결하고 싶어해서 정말 짧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국가 번호 82 출신의 성격 급한 현대 한국인에 걸맞는 모습이다
일한지 3주째가 다 되어가던 무렵, 이제 일도 적응이 되고 내가 1인 분의 몫을 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 일주일에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출근 아니면 등교 아니면 둘다 해야 하는 일정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던 참이었다. 어느날 출근을 하는데 몰이 정말 무거웠다. 잠도 잘 장고, 집을 떠나온 이래로 가장 잘 먹고 잘 살던 시기였는데 땅에서 발이 떨 어지지 않았다. 그와중에 전에 언급한 침입사건도 있었고 그 일을 겪으며 같이 살던 룸메들에게 실망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학원 시험 성적그래프가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오면 밥 먹고 자고일어나서 일하러 가기 바쁘니, 공부 시간도 줄었고 퇴근하면 공용 욕실에서 씻고 빨래하고 겨우 눈이나 붙일 수 있었다. 물론 일하면서 전화 받는 것도 익숙해졌고 무시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익혔지만 나는 그런 게 아니라 애초에 날 무시하지 않을 영어를 배우고 싶었기 때문에 이상과 현실 사이에 간극이 생겼다.
내가 배우고 성장할만한 동기가 없다면 쉽게 질려버리는 사람인 나는 주급이 주는 행복을 몰랐다 . 배부른 소리라고 할텐데, 맞다. 이미 여유자금이 있으니 돈으로 행복을 찾으려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근데 처음부터 공부가 목적이었던 사람이 돈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면 그게더 멍청한 선택 아닐까? 그래서 나는 몇 주 더 일 하다가 통장 잔고를 보고 이정도면 남은 기간 정도는 손해 없이 생활 할 수 있겠다, 싶었을 때 그만뒀다. 그만두고 다시 공부하며 나는 이 비자의 취지와 맞지 않는 사람이구나,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