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아껴 먹은 퇴근길
결국 뉴질랜드를 떠난 이유는 한 가지 이유가 아니라 그 상황 전부가 지겨웠기 때문이 맞는 것 같다.
개중에 뉴질랜드까지 나와서 한국 직장 분위기를 유지하던 동료들의 일 하는 방식도 한몫했다. 이억만 리 외국에서까지 한국인의 센스를 요구하고 한 사람이 맡을 수 없는 업무를 떠넘기는 소위 '최저시급알바'분위기를 유지해 준 덕분에 빠르게 그곳에서 벗어났다. 나는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았고 단톡방에서 나오자, 그 인연은 그대로 끝났다. 물론 한국인 조심해라, 이민자들이 더 무섭다는 말을 다 듣고 갔다. 왜 한국인 업장은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지 이해했지만, 콧대 높은 백인들은 백인들끼리 일하고 싶어 하고 키위들은 1년 이상의 현지 경력 (최소 6개월)을 요구하는데, 선량한 (불쌍한) 한국인이 갈 수 있는 선택지란 코리아포스트에서 최저 시급으로 미친 듯이 부리는 한인잡밖에 없었다.
그래도 열심히 일하던 중에 마음을 접게 된 계기는 가게에 방문하는 한국인 손님들이 선을 넘을 때였다. 손님이라고는 하지만 전(ex) 알바가 찾아와서 현 알바와 친목질 하고 비품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고 업무에까지 손을 댔다. 도움이라곤 하지만 이미 포화상태인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꼴이었고, 그 상황을 보고 말리지 않는 매니저를 보고서 여긴 위계라는 게 없는 주방 같아서 도망쳐야지, 마음먹었다. 그 후, 몇 주 지나지 않아서 나는 나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 후부터는 남아서 동료들을 기다리거나 나를 아니꼽게 보는 사람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하기보단 먼저 나오길 택했다. 이미 마음이 뜬 날부터 나는 밤 10시까지 하는 젤라토 가게에서 두 스쿱에 8달러(약 6천 원)하는 젤라토를 먹기 위해 누구보다 빠르게 마감하고 환복, 인사를 하고 뛰어 나갔다. 원칙상 근무는 10시까지였는 데 영업은 9시 30분까지여서 마감을 빠르게 할수록 빨리 집에 갈 수 있었으므로 대부분 50분쯤 퇴근을 했었다. 그러면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젤라토 가게까지 빠르게 뛰어가서 최대한 그분들의 마감을 방해하지 않고 내 아이스크림을 샀다. 그리고 그걸 조금씩, 아껴서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열심히 먹었다.
한국에선 늘 컵에만 먹었는데 그 시기에 맛있는 시그니처 와플콘을 발견하고 나서는 꼭 와플콘으로, 새콤한 과일 셔벗이 위로 오게 해서 먹는다. 그만두겠다는 노티스 이후로 3주, 금요일과 토요일엔 11시까지 영업하는 그 아이스크림 가게를 주에 세 번, 남은 기간 동안 성실히 방문해서 모든 맛을 한 번씩, 전부 먹어봤다. 그게 내 유일한 위로였다.
일을 그만두기로 하면서 한국에 있는 엄마와 본격적으로 한국을 돌아오기 전에 무얼 할지 고민했다. 이 긴 여행이 끝나면 함께 호주에 가기로 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생각에 설레서 밤늦게까지 전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으로 여행을 떠나는 학생들처럼 이곳저곳 궁금했던 지역들을 찾아보고 어떤 지역이 갈지, 함께 의견을 모았다.
계획이 얼추 정리가 되자 망설임 없이 호주행 비행기표, 한국행 비행기표를 결제하고, 집을 정리했다. 집에 돌아가기까지 딱 3주가 남았었다. 마지막 3주 동안 작은 내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짐을 정리하고 계좌를 정리하고 마음을 정리했다. 마지막 주 금요일엔 졸업식을 했다. 매주 하는 행사인데, 내가 그 자리에 서는 건 두 번째였다. 처음 졸업할 때는 별 게 다 아쉬워서 눈물도 났는데, 이것도 두 번째라고 하고 싶은 말, 해야 하는 인사, 한국어 인사까지 꽉꽉 담아 마치고 단상을 내려왔다. 나는 내 가장 친했던 친구 두 명과 함께 졸업했다. 총 20주, 눈에 익은 학원에 , 선생님들에게, 친구들에게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마지막날이구나, 생각했다.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싫어서 시내의 작은 방을 얻어 살았다. 공용 욕실을 사용하며 주에 21만 원 쯤 되는 방에 살았는데, 그동안 살았던 흔적을 지우고 마지막으로 점검을 했다. 그래도 내 방이라서 남들의 방해 없이 안전히 지낼 수 있었는데 그거 하나가 나에게는 큰 기댈 곳이었기에 애착이 가는 방이었다.
한국을 나오면서도 이것저것 정리하고 미처 하지 못한 정리는 나와서까지 한국과 소통하며 마무리했는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과정마저 정리였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는 것 같다. 여기저기 흘리고 다닌 흔적도 많고, 눈에 밟히는 곳이 많았다. 이곳저곳이 전부 눈에 익어서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떠나는 날에는 사실 좀 슬폈다. 솔직히 눈물을 흘렸다. 내 것, 내 사람, 집, 마음을 두고 다시 어딘가 어색한 곳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막막했다. 때가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배우고 싶은 게 없고, 시간과 노력과 돈을 이곳에서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떠나기로 했지만, 막상 정말 그렇게 하자고 하고 비행기표를 손에 쥐니까 끝이라는 게 현실로 다가왔다. 나는 늘 마지막에 서툴러서 도망치듯 나와버리곤 한다.
공항에서 한나절을 넘게 대기했다. 너무 새벽 체크인 비행기라서 공항 노숙을 하기로 했는데 시간을 과하게 여유롭게 잡아서 13시간을 넘게 공항에 있었다. 깨끗하고 누울 수 있는 공항이라 기다리는 게 지루하진 않았지만 기다리다가 사고가 있었다.
마지막 저녁으로 pitapat에서 보울과 tank에서 스무디를 한 잔 마셨다. 저녁을 먹고 나니 나른 해저서 씻고 눈을 붙여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선하게 바람이 통하는 공항에서 담요도 덮고 따뜻하게 입고 있으니 자연스레 든 생각이다. 양치를 하고 돌아왔다. 입도 상쾌하고, 벌써 수 시간을 공항에서 방황했기 때문에 지쳐서 의자에 누웠다. 아무리 공항에 놓인 의자여도 나름의 쿠션이 있어서 눕는 자세가 꽤 괜찮았는데 캐리어에 잘못 넣은 짐이 생각나서 작은 짐가방을 열었다. 그 가방에 잘못 들어간 건 없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래서 별 소득 없이 그 가방을 닫고 다시 트롤리 위에 올려놓다가, 억, 하는 소리와 함께 허리를 삐었다.
내가 상상하지 못한 최악의 마무리였다. 여권 놓고 오기, 짐 두고 오기 같은 것들은 예상해서 미리 수십 번이나 확인했는데 내가 다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눕지도 앉지도 서지도 그렇다고 가만히 있지도 못한 새벽이 지나고 비행기가 이륙하자 그제야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반나절동안 욱신거리는 허리를 붙잡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서성이니, 꽤나 수상해보였겠지만 신경 쓸 겨를 없이 얼른 출국장 안으로 들어가서 또 누워있다가 비행기에 올랐다.
거의 잠들지 못한 밤이 지나고 동이 터서야 앉은 비행기 자리, 그게 안전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오랜만에 창밖이 보고 싶어서 예약한 창가자리 대신이동이 편하도록 변경을 부탁한 복도 좌석이 무색하게 이착륙 모두 보지 못하고 죽은 듯이 잠든 사이에 도착했다. 어차피 여행의 첫날이라는 점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앞으로 3주 남은 여행의 가장 정적인 여행지였다. 차도 있고 무엇보다 혼자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온 엄마와 보자마자 눈물이 고였다. 출국장 면세점 앞에서 우는 이상한 동양인 2인이 되고 싶지는 않아서 유쾌하게 웃어넘겼지만 그 어떤 순간보다도 가장 기억에 남을 장면이었다. 반년이 넘게 보지 못했던 가족을 공항에서 만나는 기분. 서러웠던 감정이 싹 씻겼다. 엄마와 만나서 브리즈번 땅을 밟은 다음부터는 한국에서 넘어온 맛밤을 먹으며 브리즈번 여행만 생각했다. 이제까지 있었던 일들이 전부 꿈같았다. 다시 16살이 된 것 같았다. 호주에 온 중 3짜리 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정말 마음이 놓였다. 뭐랄까, 돌아온 기분, 코로나 때문에 멈춘 시계가 그리웠던 곳에 발을 딛자 5년 만에 다시 흐르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