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써버려도 좋아, 도망치지마

낭만을 찾아서 떠나온 사람의 이야기

by 하얀












생에 처음으로 했던 여행을 기억하시나요?


저는 운이 좋게도 그 여행이 참 빨랐는데, 특히 해외여행에 있어서는 유별나게 빨랐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평생을 나라 밖에 나가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저는 참 운이 좋았습니다. 지난 몇 년간은 매년 새로운 곳을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집이 부유한 편도 아니고 저와 어머니의 여행을 위해 늘 아버지는 일을 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덕을 참 많이 봤습니다. 어머니의 알뜰함과 기회를 위해 투자하는 결단력이 제 인생에 한 줄 문장을 늘려줬습니다. 학원을 다니는 것이나 과외를 하나 하기보단, 가서 느끼고 즐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덕분에 글 줄기 하나만은 한 움큼 쥐고 어른이 되었습니다.


제 첫 여행은 태국이었습니다. 덥고 습한 그곳에서 넓은 공간에서 자라는 코끼리들을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들을 마주했습니다. 알록달록한 열대 과일을 원하는 만큼 먹고 시원한 이부자리 속에서 잠들었습니다. 예순이 넘어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나와보신 할머니와 저는 신기한 것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마치 꽃향기처럼 향긋한 향신료들과 시끌벅적한 휴양지의 향은 제가 사는 내내 동남아시아의 추억에 젖어 살게 했던 이유가 됐습니다. 집 앞의 바다와는 달리 맑고 깨끗하고 산뜻하게 빛나는 태평양이 있었습니다. 매일 보는 동해 바다는 어떨 땐 너무 무겁기도 한데, 형형색색의 산호가 빛나던 그 바다는 인어 공주가 살 것처럼 예뻤습니다. 수족관에서만 봤던 작고 노란빛의 물고기와 떼 지어 움직이는 작은 물고기들, 이리저리 쏘다니는 저를 피해 다니던 그것들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후로 1년이 좀 넘게 지났습니다. 저는 미국 땅을 밟았습니다. 그사이 키가 좀 더 크고 배운 게 늘었습니다. 하지만 미지의 땅, 기회의 땅 미국을 하나도 알지 못한 채 샌프란시스코의 번잡하고 치열한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 한 달간의 여행 동안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한 여정은 미 서부 광활한 사막으로, 라스베이거스의 활기로, 뉴욕의 높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과 타임스퀘어로 저를 데려다 놓았습니다. 어떤 날엔 종일 차로 이동하며 저 멀리 지평선을 넘어가는 해를 구경했고 다른 날은 사막에 예상치 않은 비가 오는 기적을 마주하기도 했습니다. 센트럴 파크에서는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발라 한입 가득 먹기도 했고 뉴욕의 높은 팁 값에 열을 올리기도 했으며 서브웨이를 너무 많이 먹어서 나중엔 지나치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릴 것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처음으로 한국 밖의 삶이 궁금해졌던 계기는 차갑고 모두가 바빴던 뉴욕에서의 경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뉴욕의 살인적인 집값과 식비를 생각하면 여행으로도 가려고 마음먹기가 어렵습니다. 근데 때마침 지인이 그곳에 살고 있었고, 기회가 되어서 함께 여행하며 숙박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우연도 행운도 때마침 저희에게 다가와주어 감사했습니다. 비는 좀 오지만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에 찾은 뉴욕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모두가 바쁜데, 저희는 그 사이에 앉아 그들을 보고 바쁨을 즐겼습니다. 무표정으로 바삐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즉석 사진을 찍고 초콜릿을 먹고 커피를 마셨습니다. 영어가 한가득 들리는 그곳에서 도란도란 떠들며 걸었습니다. 찬 바람이 불고 사람들은 우릴 빠르게 지나치고 해가 지는 풍경이 건물 유리창에 부딪혀 눈으로 들어오던 그 순간이 얼마나 그리운지 모릅니다. 꼭 그곳에 살겠노라 결심했던 것이 마치 어제 같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코로나가 있기 직전, 2020년 2월 3일, 시드니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동안 유럽의 여러 나라, 일본 등등 많은 나라를 여행했었고 그 여행은 잘 본 영어 시험에 대한 보상이었습니다. 지금도 저와 어머니는 이 여행을 다녀오길 잘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후로 국경이 닫힐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그것이 학창 시절 제 마지막 여행이 될 줄 몰랐고, 그만큼 더 즐길걸, 하며 가끔 후회는 해도 단연코 제가 가장 행복했던 여행이었습니다.

그 여행을 하며 지난 것들과 다른 감상을 받은 게 있다면, 참 자유로웠다는 것입니다. 밤에 오페라 하우스 주변을 걸으며 젤라토를 사 먹고 바닷바람을 맞는데, 정말 행복했습니다. 지나치게 행복해서 죽어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버스킹 하는 사람들의 영상을 찍으며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따라 웃기도 하고 별거 없는 골목길을 걸으며 시시 껄껄한 얘기를 하기도 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멀리까지 가서 한 달을 그렇게 지냈다고 하면 우습게 볼 수도 있겠지만 물론 매일 그렇게 지낸 건 아니었고 특히 뉴질랜드에 갔을 땐 정말 매일이 액티비티의 연속이었습니다. 자연을 좋아하지 않는 제가 초록색만 보면 기함을 할 정도로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런 건 다 잊힐 정도로 그 밤의 기억들이 정말 새록새록합니다. 저는 그 여행 이후 4년을 그 기억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영상을 닳도록 보며 힘든 시간을 견뎠습니다. 울면서 그 영상을 본 게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시드니라는 도시는 제게 그런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만 18세, 20살, 1월에는 술을 참 많이 마셨습니다. 피의 절반은 술이었을 겁니다. 전날도 술을 마시고 감기에 걸린 몸으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했습니다.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어지럽고 숨이 뜨거웠는데 어쩌다 보니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비자 신청을 마쳤습니다. 부산 백병원에서 비자용 건강검진을 마치고 경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서는 비자 승인 메일이 왔고 대학교에 입학해서 기숙사에 입소를 했고 여름에는 비행기표를 예매했습니다. 필리핀에 여행도 짧게 다녀왔습니다. 가서는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을 취득하고 바다를 한껏 머금고 돌아왔습니다. 조금 까매진 팔과 얼굴을 보며 엄마와 함께 웃었습니다. 비가 참 많이 왔는데 신기하게도 다이빙하는 날이면 해가 맑게 개어서 저 밑바닥까지 보였습니다. 벌써 10년 전이 된 태국 바다를 생각하며 오늘 이 바다 안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가을을 지나 첫눈을 봤고 크리스마스가 지나면서 출국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2024년은 여러모로 마음이 붕 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이후로 오랜만에 한 권 완성해 본 일기장은 여기저기 빈 구석이 많았고 바다로, 산으로, 국내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다니기도 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에 한눈 팔린 시간도 있었습니다. 작년 한 해 주야장천 듣던 노래를 지금 다시 들으면 그때 그 냄새가 나는 것 같고 가끔은 그때가 그립기도 합니다. 그렇게 겁내던 20살을 무사히 마치고 이제 적응을 끝냈는데 또 새로운 곳으로 향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참 부담스러웠습니다. 고여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정이라 새로운 곳으로 저를 흘려보낸다는 것이 정말 많이 힘들었습니다. 사실 제가 한 선택이라 후회하지도 못하고 떠밀리듯 온 것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이야기해 보지만, 저는 제 선택에 후회하면서도, 주저앉아 울면서도 내일의 할 일을 생각했습니다. 돌아오라고, 다 포기해도 된다고 이야기했어도 돌아가지 않았을 것을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포기해도 된다고 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해보고 가면 더 좋을 것이라는 걸 모두가 압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매일매일이 고난이지만 아직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 같아서 더 해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월 31일, 비행기에 몸을 싣던 저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전부 써버리고 와도 좋으니 해보자. 도망가지 말자.

이제는 제가 원하던 그곳으로 떠날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나 원하던 낭만이 있는 곳으로 떠날 시간이었습니다.


마음의 준비는 진즉에 다 했고 남은 건 신발을 신는 것, 그뿐이었습니다. 이 발을 떼면 앞으로 1년, 혹은 더 오래 이 집을 볼 수 없겠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눈물이 났지만 꾹 눌러 담고 애써 웃으며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다시 올 곳이라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은 게 없었습니다. 첫발을 떼던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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