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전부 넘쳐서 증발해 버렸을 때
미국을 다녀온 지도 이제 3주가 다 되었다. 처음 그곳에 갈 때엔 뉴질랜드가 여름이고 미국이 겨울이어서 공항에 발을 떼자마자 급히 목도리를 둘렀던 게 엊그제 같은데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내가 살던 뉴질랜드로 돌아온 지금, 나는 이곳에선 한 번도 입을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두꺼운 털외투와 긴바지를 입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중심지인 맨해튼에서 가장 느리고 조용하고 변함없는 오클랜드로 돌아오니 그 사이 간극이 크게 느껴진다.
미국에서 나는 웬만한 간병사보단 적지만 사회 초년생, 20대 초반의 내가 잠깐 여행하기엔 충분한 만큼의 급여를 받으며 아는 분의 간병을 했다. 드레싱, 하우스 키핑, 보호자 내지는 동거인 역할을 해내야 했는데, 내 나름의 최선을 다하며 2개월, 정확히 32일의 시간을 보냈다. 2월 3일에 도착해서 5월 3일에 끝난 내 간병은 끝이 해피앤딩은 아니라서, 그래서 한동안 그 혼란스러움을 주체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모든 게 경험이라 치부하고 넘겨버리니까 그렇게 힘들지도 않았다. 내가 매정한 면이 없지 않다는 것도 인정하지만 결국 지난 수년간의 작별인사가 정말로 막을 내린 날, 나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고 거리감을 두고 인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정말로 괜찮았다.
나는 내가 처음 죽음을 목도했을 때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슬퍼하는 줄로만 알았고 그런 것들을 겉으로 티 내지 않는 일에 능숙한 줄로 알았다. 공부를 하면서도, 친구들과 놀면서도 그리 슬프지 않았다. 눈물은 자기 전, 그 사람과의 추억을 떠올리는 시간이 되어서야 한 방울쯤, 그렇게 많이 흐르지도 않았고, 복기하고 그리워하기에 바빴다. 그 후에 부모님이 여러 차례 이혼을 입에 올렸을 때도 나는 그다지 슬프지도 않았고 화나지도 않았고 그저 이 상황이 끝나고 평화가 다시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물론 완전히 괜찮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어느 날은 하지 말라는 행동을 하기도 하고, 습관처럼 상처를 내기도 하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글로 남긴 흔적들을 보면 지금 내가 살아서 이렇게 많은 경험을 하게 된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느 순간에는 그렇게 힘들어하면서도 대체로 어렵지 않게 일상을 유지했다.
나도 잘 몰랐다, 부모님이 이혼 서류를 쓰니, 마니 해도 괜찮았고 친한 사람이 죽어도 괜찮았고 내가 힘들어도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게 어렵지 않았고 이번에도. 지난 내 평생을 알고 지내온 사람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여행을 계획하는 나를 보며 어떤 점에선 내가 정말 정이 없는 걸까? 감정을 느끼는 부분이 남들보다 약한가? 하는 생각을 했다.
회피형이라고 말하는 건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나는 도망치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나에게 닥쳐오는 바람을 다 맞는다. 그 대신에 그것들에 반응하지 않는 것에 도가 튼 것이다. 죽음과 이별과 아픔 같은 것들에게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도망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 자리에 꿋꿋이 버티고 서서 그것들을 다 받아낸다. 그러면 내가 정말 예민하고 힘들어지는데, 어릴 때의 영향으로 나는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에 약하고, 드러내는 것 또한 싫어하기에 날 조절한다. 화가 나면 조용해지고 내가 지금 예민하다는 것을 숨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에 집중하느라, 남들을 배려한다고 생각하며 예민하고 힘든 나를 숨기다가 남들은 나의 겉만 보고 내가 무정한 줄 알거나 혹은 굉장히 신경질적인 사람인 줄 안다.
너무 힘들었다. 환자 곁에서 24시간 내내 그를 보살피는 것도, 모두에게 나는 단지 보호자일 뿐인 것도. 주인공이 되려는 게 아니라, 날 보살필 사람은 그곳에 아무도 없었다. 내가 그를 돌보면, 나를 살필 사람이 하나쯤은 있었어야 했는데, 아무도 없는 그 상황이 정말 지옥 같았다. 미국에서 한 달을 살았을 때, 결국 나는 내가 힘들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전에는 피곤해서, 그냥 내가 예민해서,라고 애써 무시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는데, 내 능력치 이상의 것을 해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를 포함한 모두를 포기하고 해야 하는 것만 하기 시작했다. 실례였을 거다. 모르지 않는다. 내 인생에서 술을 가장 많이 마신 기간이었다.
이제 집에 가라고 했을 때 솔직히 후련했다. 내 행동과 결정에 끝까지 책임지지 않은 것은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야 하는 일을 무시하지 않았다. 단지 감정 없는 기계가 된 기분이었고 간병은 감정 없이 환자를 대하면 그가 외로워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 점에서 나는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여정을 지켜봐 온 사람으로서, 그가 아프지 않길 바라는 사람으로서, 마지막 두 달은 최악의 상태였음을 모두가 알았고 마음 한편엔 제발 이 과정이 평안히 끝나길 바랐기 때문에 그나마 어렵지 않게 납득할 수 있었다.
만 19살에게 두 달이라는 시간이 결코 짧지는 않았다. 이제야 적응하고 잘 살아보려는 노력을 하던 중에 벌어진 일인 만큼 두고 온 일자리와 사람들이 계속 눈에 밟혔다. 그래서 더 힘들기도 했다. 빨리 돌아가야 내가 이루고 온 것들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미국을 가는 것이 어떤 면에선 하나의 기회이지만 다른 면에선 미련이 남는 일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미화가 많이 되어서 좋은 경험이었다고 하고 싶다. 특히 여행으로써 바라본 뉴욕과 뉴저지는 젊음과 생기의 중심지였다. 모두가 들떠있고, 지하철은 언제나 만석이고, 어딜 가든 비행기에서 막 내린 듯한 관광객들이 두리번거리며 길거리를 구경하는 모습은 정말 나까지 행복해지는 모습이었다. 신남과 긴장으로 가득 차 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은 열정이 가득했고 손에 쥔 베이글마저 그들의 특징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까지 있는 곳이었다.
딱 10년 만에 다시 방문한 맨해튼에서 나 홀로 돌아다니며 추억을 되새기는 일은 환상적이었고 다시 내가 이런 기분을 만끽할 수 있을지, 정말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반나절을 전부 미술관에 쏟아붓는 일도, 하루에 3만 6천 보를 걸어 맨해튼의 남북을 전부 보는 것도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익숙해지고 나서는 해가 지는 걸 보고 돌아오기도 하고 맛집을 찾지 않고 식당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이런 사소한 재미를 그 긴 일정의 마지막에서야 겨우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 슬펐지만, 마지막에라도 나를 위해, 나를 돌볼 시간이 주어졌던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미국은 뉴질랜드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 독특함이 있는 나라였다. 특히나 뉴욕에서 지내서, 주로 맨해튼으로 여행을 다녀서 그런지 몰라도, 길거리에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나무 밑에 누워서 그림을 그리고, 지하철에서 밥을 먹는 것까지도 정말 뉴욕 같아서 캐나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날, 야간버스로 지친 몸을 이끌고 올라탄 뉴욕 지하철 5번에서 정겨움을 느꼈다. 시끄럽고 더럽기로 유명한 뉴욕 지하철도 그들에겐, 그 당시 나에겐 일상이었고 편안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은,
고생했고, 다시 고생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