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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 Oct 17. 2019

할아버지, 할아버지

[매일의 축제] 네 번째 이야기


몇 권의 두툼한 앨범을 가득 채운 어릴 적 사진을 보면 노란색의 택시를 자주 만나게 된다. 어린 나는 택시 문에 기대어 나름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거나 트렁크 위에 앉아 있다. 나의 사진을 가장 많이 찍어줬던 사람은 할아버지였고, 그 무렵 할아버지는 택시운전사였다.


우리와 한 집에 쭉 함께 살았던 할아버지는 내가 중학생쯤이었을까, 경기도 광주의 만선리에 집을 지어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혼자만의 생활을 꾸려 나갔다. 엄마, 아빠 그리고 할머니는 한 달에 두 번 떡집이 쉬는 날이면 갖가지 음식이나 과일을 챙겨 만선리로 향했다. 쉬는 날이 아니더라도 자주 들러 농사를 도왔다. 가끔 내가 함께 뵈러 갈 때도 있었는데, 나를 보면 반달눈이 되어 웃던 할아버지는 당신의 큰아들인 아빠에겐 그런 웃음을 보이질 않아 의아했다. 별달리 반가운 인사조차 없었다. 평생 자식들 중 유일하게 할아버지를 살뜰히 보살펴온 아들과 며느리였지만, 사랑 표현엔 몹시 인색했던 할아버지. 때로는 엄마, 아빠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기도 하고 큰 소리가 오가기도 했다. 만선리를 다녀온 엄마, 아빠의 안색이 좋지 않은 날이 늘어갈수록, 내가 점점 커갈수록, 할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쌓이기 시작했다. 가족들을 속상하게 하는 할아버지가 미웠다. 종종 이런 마음을 엄마에게 털어놓으면, 늘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하영아, 그래도 할아버지가 너에겐 지극정성으로 잘해주셨잖아. 너는 그 마음만 기억하고 할아버지께 잘하면 되는 거야." 물론 엄마의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나는 집안의 첫 번째 손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일제시대부터 전쟁까지 모든 걸 겪어온 옛사람이었지만, 내가 아들인지, 딸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누가 보면, 세상에서 혼자 손주 생긴 줄 알았을 거야. 유난도 그런 유난이 없었어" 라던 할머니의 말처럼 할아버지는 첫 손녀인 나를 특별히 대했다. 어느 새벽 잠에서 깬 내가 쿨피스를 찾았으나, 삼촌들이 이미 다 마셔버려 없다는 걸 알고 울기 시작했는데, 그런 나를 할아버지가 업고 호돌이슈퍼 문을 두들겼단 이야기는 지금껏 살아오며 열 번도 넘게 들었던 대표 일화다.


나는 늘 바빴던 엄마와 아빠 대신 할아버지와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젊은 할아버지는 내가 백일이 지난 후부터 나를 품 안에 쏘옥 넣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필름 카메라로 나의 모든 순간을 담았다. 낙엽이 쌓인 산에서 찍은 내 사진을 아주 크게 인화한 액자는 우리 가족이 새 집으로 이사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30년 동안 3층의 거실 한가운데 걸려 있다.


할아버지의 노란 택시 뒷좌석 길이와 나의 키가 비슷해졌을 땐, 편히 누워 한참 자다 일어나 창문 밖을 내다보면 자연농원이란 글자가 보였다. 우리는 자주 그곳에 가서 신나게 놀았다. 내가 난데없이 피로회복제 음료인 원비디진액 맛에 빠졌을 때에도 할아버지는 매일 내 손을 잡고 동네 자애약국에 가서 원비디를 쥐어주었다. 우리 동네에 교보문고가 처음 문을 열었던 날엔 신기한 곳에 생겼다며 나를 데려가 미키마우스 지갑과 영어동화책을 사주었던 할아버지. 어릴 땐 잠을 잘 때도 엄마 옆이 아닌 할아버지 옆에서 잤다. 내가 아플 땐 직접 약재를 달여 만든 한약을 주셨는데 울렁거리는 맛이었으나 할아버지를 보며 꿀떡꿀떡 마셨다. 어느새 내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할아버지는 늘 문을 나서는 내게 이런 말을 건넸다. "차 조심, 사람 조심" 그리고 언젠가부터 동생들에게, 결혼 후 남편에게 나는 같은 말을 했다. 할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했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거 같다고 생각하면서.  


할아버지가 만선리로 떠난 후 나와 동생들은 방학이면 할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이천 미란다 호텔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고,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나와 이천 쌀밥을 먹는 우리만의 코스가 늘 반복되었다. 대학생이 되었을 땐 문득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오면 할아버지 집으로 달려갔다. 내가 언론홍보학과에 입학하니 할아버지는 무조건 내가 아나운서가 되리라 믿었다. 난 단 한 번도 아나운서가 되겠단 말을 한 적이 없는데도 신문기사나 텔레비전 뉴스에서 방송사 공채 소식이 들려오면 내게 전화를 하셨다. '하루는 내가 어느 대학교 앞에 차를 세워 두고 학생들을 한참 봤는데, 하영아 너보다 예쁜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너처럼 똑똑하고 예쁜 애가 아나운서 안 하면 대체 누가 아나운서를 하니'와 같은, 누군가 들으면 몹시 낯간지러울 말을 할아버지가 할 때마다 그저 웃고야 말았지만 나에게 맹목적인 사랑과 신뢰를 보내는 존재가 주는 큰 용기와 위안이 분명 있었다.


할아버지는 봄이면 집을 둘러싼 정원에 아름다운 꽃을 한가득 심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예쁜 꽃만 고르고 골라 신문지에 돌돌 말아서 내게 주었다. 내가 가지 못할 때면, 엄마 편으로라도 나에게 꼭 꽃다발을 전했다. 결혼 후엔 큰 상자에 '하영'이란 이름을 쓰고 내 몫으로 가장 예쁜 감자를 골라 담기도 했다. 어쩌다 한 번씩 내가 전화를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고마워, 고마워'만 반복하던 할아버지.


지난 9월 말, 할아버지가 갑작스러운 뇌경색으로 응급중환자실에 계신단 소식을 들었다. 의식이 없는 채로 침대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꼭 하고 싶었던 말을 천천히 꺼냈다. 며칠 후 할아버지의 증상이 조금 나아졌지만, 의식이 돌아온다 해도 남은 생은 침대 위에서 보내야 한단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날 밤 마음속으로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다음 날 이른 새벽 아빠의 전화가 울렸다. 받기 전부터 어떤 소식인 지 온몸으로 느껴졌다.


만선리 주민분들은 나를 본 적이 없는 분 조차도 모두가 나를 알고 계셨다. 할아버지가 이웃분들에게 늘 내 이야기를 했다는 것도, 핸드폰에 '우리 예쁜 하영이'라고 나를 저장해놓은 것도, 아침이면 티비장 위에 놓인 작은 가족사진을 보며 내게 인사를 했다는 것도, 나는 알지 못했었다. 하지만 알았다 해도 과연 내가 달랐을까. 더 자주 찾아가고, 더 자주 전화했을까, 이 물음에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 우리에게 아직 남은 시간이 많은 줄 알았다는 뻔한 후회를 하게 될 줄도 몰랐다.


할아버지가 좋아했던 과일을 씻다가, 문득 새벽에 잠에서 깨었을 때, 세수를 하다가, 밥을 먹다가,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왈칵 쏟아진다. 세 번째 책을 연재할 때만 해도, 아니 이 글을 머릿속에 그릴 때만 해도 할아버지와 나는 같은 세상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다른 세상에 있다는 게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한동안, 아니 평생 이런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의 얼굴을, 목소리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게 정말일까. 집을 찾아가 할아버지를 부르면 문을 열고 나오시지 않을까. 




할아버지, 최근에 본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이런 말을 해요. 우주가 왜 가늠할 수 없이 넓은 줄 아냐고. 각자의 자리가 하나씩 마련되어 있대요. 행성에서 영원히 머물 수 없어서 정해진 시간이 되면 그곳으로 이주하는 거지. 나는 이 말을 믿기로 했어요. 우리 거기서 다시 만나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꽃 들고 만나러 갈게요. 그땐 내가 더 많은 사랑을 줄게요. 고마웠어요. 벌써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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