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까마귀 인간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건 놓여있는 상황이다!

by 세림


"아니, 기억 안 나요?"

"여기 학원 아니에요?!"

"집에 가서 공부는 해요?"


입사 1년 동안 근무하며 가장 많이 들은 말 BEST 쓰리다. 예상은 하고 출근을 결정했지만 일반 법인 회사에서 일했을 때와 180도 다른 직장인의 삶... 그것이 세무 대리인이었다.





입사하기 전엔 신입이어도 일반 회사에서 인사팀과 경영지원팀을 오가며 굴러온 경력이 있는데 금방 적응하겠지라고 생각했다. 하물며 법인 회사 회생 절차까지 경험이 있으니 나름의 생각으로 지나온 회사 경험들이 임팩트 있다 느껴지기도 했다. 직장 생활을 하며 내가 가장 중요시 여긴 것이 바로 이것. 일의 양보다 사람과의 관계로 오는 문제 들이다. 무례함과 관례 속에 직장인의 하루를 파묻어 버린 채 아무 즐거움도 성취감도 느끼지 못하고 집 보다 더 오랜 시간 회사에서 보내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느꼈다. 이것이 회사를 고르는 기준과 오래 다닐 수 있는 마지노선이 되었다. 그래서 회사가 힘들수록 더 끈끈하게 버텼고, 신생 회사가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울 때 함께 시작이라는 마음의 전우애로 그 시간을 이겨냈다. 그렇게 관계를 먼저로 생각하며 일했던 나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더불어 경력 단절이 되기 전까지의 나는 두뇌 회전력도 지금처럼 노후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난... 바보가 되어버렸다. 사실 이 바보가 진짜 나인지 회사에서 만들어낸 프레임 속에 내가 바보의 모습인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입사 1년 만에 마주한 내 모습은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자신감은 어디에도 없는 일 멍청이로 존재하고 있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처음 몇 번의 타박과 알려준다는 명분하에 내려오던 무수한 말들에 상처받던 나는 훈련받는 개처럼 어느 순간 그저 내가 부족해서 내가 모자라서 이런 말을 들어도 괜찮다 느껴졌다. 진심이다. 나중엔 그들이 뭐라 하면 화가 나기보다 내가 부족한 부분을 먼저 찾으려 했다. 어쨌거나 나는 경력을 쌓기 위해 입사했으니 참아야 했고, 나이 마흔 넘어 입사시켜 줬으니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하며 버텨야 했다. 버티는 것만이 능사라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최선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스스로 나이의 한계에 져버렸다. 자신감을 잃었다. 마흔이 넘어 신입으로 입사했으니 참고 버티면 3년만 지나도 아니 2년만 지나도 꽃길이 열릴 줄 알았다. 근데... 오늘 행복해야지 마음이 병들어 타버린 미래에 나를 어찌 기약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워킹맘에게 24시간은 진짜 금 값처럼 무겁고 자식의 커가는 시간을 못 보는 것만큼 아쉽다. 다행인 건 아이가 중학생이라 빈틈이 생기는 것에 감사하다. 그렇다고 퇴근 후 집에 오면 시간이 남아도는 게 아니다. 회사 퇴근 후 집으로 다시 출근일 뿐. 신입 워킹맘은 모든 게 낯설기 때문에 회사에선 온종일 긴장 상태다. 집에 와서도 쉴 틈이 없다. 저녁밥 챙기고, 청소하고 빨래는 매일 해도 끝이 없다. 맞벌이라 일은 남편과 똑같이 하지만 집안일은 거들뿐 온전한 아내... 엄마 몫이다. 모든 정리를 끝내고 공부하려고 앉으면 이미 11시가 넘는다. 기진맥진... 아무것도 눈과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음날 업무 하다 막혀서 물어보는 건 사치다. 경력자들도 바쁘니까. 혼자 해결하려 노력하려다 시간이 순삭 지나간다.


결국 물어보면


"아... 내가 이해할 때까지 알려 줄 순 없잖아요?... 여기가 학원도 아니고!"


이런 비슷한 일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점차 질문이 줄어들게 되었다. 챗지피티와 네이버 검색에 빠지게 된다. 그래도 틀리면 또 들려온다.


"언제까지 알려줘야 해요!!! 아니 이건 기억해요!!!.."



아니 알려주지 않은 부분도 있고 알려줘도 자기 스타일로 알려주니 신입은 도저히 못 알아먹는 순간들이 투성이다. 까마귀가 되어버린 인간인가! 이 정도로 일 멍청이는 아니었는데. 자꾸 혼 날 일이 생기니 점점 더 바보가 되어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는 것도 잊어버렸다. 현관 비밀 번호도 매일 보던 핸드폰 비밀 패턴도 순간 기억이 나질 않기 시작했다. 찾아보니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정서적 우울증의 시작이라고 했다.


화를 참지 못 하고 버럭 했다가 갑작스레 눈물이 터지기도 했다. 내가 이토록 바보였던가. 열심히 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몇 개월이 인정 욕구가 강한 내게는 버티기 힘든 모양이었다. 마흔이 넘었다는 굴레에 나를 가두고 우울의 심연으로 밀어 넣은 샘인 것이다.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내가 바뀌어야 한다. 왜? 나를 살릴 사람도 나를 멋진 사람으로 만들 사람도 타인이 아닌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불 빛을 만들어 보자!!!



오래된 상하 관계, 묵혀둔 관례는 굴러 들어온 돌이 절대 쉽게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빠른 정리를 할 수 없다면 차가운 가슴과 독한 의지로 상황을 이겨내려 마음먹었다. 정서적 이해를 바라지 않는 것이 첫 번째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다. 돌아오는 상식 밖에 무례한 말들에 자신을 던져두지 않는 것이 두 번째다. 당장 박차고 회사 밖으로 뛰쳐나가며 가슴속 품고 있던 사표를 던지고 싶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렇기에 무례한 말이 달려올 때 회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이다. 최근에 나는 더 이상 커져가는 무례함에 바보처럼 당하고 싶지 않아서 이대로면 더 이상 일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경력만 바라보며 버텼는데 경력을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신의 행복이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참 신기한 일이다. 마음만 고쳐 먹었을 뿐인데 머릿속 자욱했던 안개가 거치는 맑음을 느끼고 있다. 나는 까마귀 인간이 아니다. 상황이 무력감과 우울감을 안겨 뇌 인지 능력을 파괴했을 뿐. 난 여전히 출근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든 박차고 나올 마음으로 당당하게 하루를 보낸다. 회사도 내가 필요 없고 내가 사라져도 금세 누군가 또 그 자리에서 일하고 있겠지만, 나 역시 이곳이 아니어도 아쉬울 것 없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면 그만이다. 이것이 더 오래 버티는 꿀팁일지도 모르겠다.




P.S

지극히 개인적이며 주관적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읽고 공감해 주셔서 항시 고마워요.

오늘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토요일 연재
이전 11화혹시... 당신 멀티 가능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