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J형... 계획형 맞아요?

신입에게 체계를 바라나

by 세림


"아니 계획형이라면서요!! J라면서요! 이게 맞아?"


(아니 뭔 루틴이 잡혀야 계획을 잡지...)


"전혀 아닌데요? 정신 좀 차리고! 생각 좀 하면서 일해요. 일 좀 스~마트 하게!"


"... 아니 아직 순서도 모르겠고, 맘대로 하면 사고 칠까 봐 그러죠...(순서 좀 알려줘라... 좀)"


"지금 문제가 뭔지 알아요? 체계가 안 잡혀서!! 체계가! 일의 체계가 아직도 안 잡혔잖아요. 체계를 잡인야지!!"


"... 체계요? 아니... 루틴이 아직 안 잡혀서...


"루틴이 뭐가 필요해요. 저랑 과장은 알아서 하잖아요..."


"(이 일 만 10년 넘게 했는데 그럼 경력자 뽑지가 목 끝까지...) 네... 알겠습니다."


입사하고 1년이 지난 얼마 전 내가 들은 가장 신박한 말. [체계]를 잡아라! 이 말을 듣고 번뜩 정신이 차려졌다. '여긴 바뀌지 않겠구나. 변하지 않겠구나. 내가 잘 보이려 노력해도 나름의 최선을 다해도 쉽게 바뀌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1년 동안 노력했던 마음을 인정받지 못하니 더 이상 노력하고 싶지 않아 졌고 버틸 의미를 잃어버렸다.




세무 사무실에 입사해서 일하며 순간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나이가 조금이라도 어렸을 때 입사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서른 초반에 아르바이트로 잠깐 세무 사무실에 출근했을 때 그때부터라도 자리 잡고 일했으면 지금처럼 힘들 진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 말이다.


82년 생 벌써 마흔의 중반. 내 아이는 십 대가 되었고, 어느새 난 40대가 되었다. 다시 사회에서 내 삶을 멋지게 살아내는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다는 건 사치일지도 모르겠지만 꼭 해내고 싶었다. 이력서를 들여다보니 거쳐온 회사는 많지만 이렇다 할 경력을 제대로 쌓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아이를 키우며 12년 가까이 물경력으로 살아왔다. 세무사 사무실은 그만큼 나의 경력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동력이 되어줄 거라 믿었다. 그랬기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며 얻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이용해 취득하는 것을 뒤로하고 세무 사무실 신입으로 취직하는 것을 기회고 행운이라 느꼈다. 당연히 힘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이 아닌 사적으로 만난 사무장은 내게 좋은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함께 일하면 더 폭발적으로 시너지 효과를 내며 많이 배우고 경력 쌓는 것에도 큰 도움이 될 거라 100퍼센트 확신했다.


입사 1년이 지났다. 세무 사무실은 1년의 루틴이 있다. 하지만 사무실마다 일의 방식은 모두 다르다. 더군다나 이곳에 출근해서 내가 받은 인수인계서는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1년의 루틴 신고 기간들은 경험해 온 경력으로 인해 알고는 있지만 어떻게 준비하고 신고하는지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체계]라는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바쁜 시즌에 입사해 들은 말은 "일하면서 배워라!"였다. 닥쳐오는 일을 쳐내느라 혼자 정리할 틈도 없었다. 인수인계서가 없냐는 말에는 "이쪽 업종은 인수인계서를 만들 수가 없어요!"라는 답변만 들었다. 출근하자마자 내가 한 것은 원천세 신고였다. 회사마다 어떤 특징이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닥치는 대로 신고해야 했다. 그다음이 부가세 신고였다. 이 또한 매뉴얼이 없으니 닥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내가 맡은 거래처뿐만이 아닌 세무 사무실 전체 부가세 신고 대상 업체의 모든 부가세 합계표와 목록표를 뽑아야 했다. 누가? 신입인 내가! 작년만 해도 나보다 6개월 먼저 입사한 미진이가 있었기에 나눠서 하루 만에 출력했지만 올해 1월 확정신고 시에는 나 혼자 모든 거래처를 출력해야 했다. 꼬박 이틀이 걸렸다. 정작 내 업체는 부가세 신고를 시작도 못했지만 경력자 둘은 이미 시작할 수 있었다. 연말정산 모든 신고 안내도 함께 공유해 왔는데 올해는 알아서 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도대체 어느 타이밍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도 없었는데 이제 1년 차인 내가 어디서 어디까지 해내야 하는 건지조차 가늠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잘하고 있는지 미리 체크도 하지 해주지 않았다. 그래놓고 하고 있으면 갑자기 나타나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이런 식으로 하니까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일을 참 답답하게 한다.' 등등의 말을 한다. 그러면 나는 점점 실수가 생긴다. 당황하고 얼굴이 붉어진다. 이런 상황은 마치 이제야 엎드리기 시작했는데 당장 일어나서 걸어보라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이제 엎드리기 시작했는데 다시 눕는 방법도 모르는데 당장 그대로 일어나서 걸어보라고 하니 도대체 미치고 팔짝 뛸 것만 같았다. 어느 회사를 가서도 이런 방법, 이런 시스템의 흐름은 경험해보지 않았다.(어느 회사란 일반 회사 기준임)


물어보면 "여기가 학원은 아니잖아요?", 안 물어보고 혼자 하려고 정보를 찾고 겨우 해내면 "왜 물어보지도 않고 일을 해요?" 모든 게 이런 식이니 나의 행동은 로딩이 길어졌고 계획을 세워도 계획대로 할 수 없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계획조차 세우지 못했다. 그런 시간을 보내왔지만 경력자가 새로 왔으니 분위기가 환기될 거라 믿었다. 그 경력자는 내가 입사하기 전 사무장과 오랜 기간 함께 일한 과장이다. 내가 입사하자 맡았던 모든 거래처들이 바로 과장이 10년 넘게 해 왔던 업체다. 그리고 나는 미진이 자리에 거래처를 새로 맡게 되었다. 그것이 올해 1월이었다.


과장은 원천세 신고가 끝나고 복귀하기로 했기에 내가 원천세 신고를 한 거래처만 100군데가 넘는다. 내 자리 원천세 신고와 미진이 자리까지 신고를 하려고 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거기에 지급조서까지 함께 신고해야 했기에 그야말로 예민 그 자체였다. 사사무장은 자신의 거래처 신고하기도 바빴기에 관심은 없었고 물어보기도 눈치 보였다. 어쩌겠는가 신고 마감일은 있으니 내가 다 할 수밖에. 그리고 과장이 복귀했다. 과장은 기존에 했던 업체였으니 부가세 신고를 수월하게 해냈지만 난 1년 차에 확정 신고는 3번째 경험. 거기에 미진이 자리의 거래처 업종 파악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가세 신고를 해야 했다. 어디 물어볼 수도 없었다. 물어보면 해결보다 더 길어지는 말들에 시간이 흘러가니 그 시간에 빨리 신고를 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부가세가 끝나고 돌아온 말은 내가 1년 동안 신고 말고 무슨 일을 했냐는 것이다. 체계적으로 인수인계서에 어느 시점엔 무얼 하고 어느 시점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업무를 왜 해야 하는지 적어도 이 정도에 내용만 있었어도 챙겼을 것이다. 나는 매번 입력하는 곳만 주력하여 입력했다. 그 누구도 내 일에 관심이 없었기에 1년 차인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일을 했다. 그랬는데 이제 와서 '일을 안 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순식간에.


신입에게 알아서 체계를 갖추기를 원하는 회사는 책임 회피성이 강하다. 거쳐온 경력 중에서 인사팀에 일하며 느꼈던 부분이 있다. 바로 인사 평가 시 상사에 대한 평가 기준에 그 팀원을 얼마나 잘 챙겼고 조직 활성화를 위해 얼마나 기여했는지 평가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신입이 입사해서 알아서 체계를 갖추고 스스로 분발해서 공부를 하며 주어진 일은 또 놓치지 말고 척척 해내야 하는 곳이다. 많은 세무 분위기고 있다 것을 알지만 이런 나의 고충은 사실상 나만의 고충은 아니다. 소통하는 세무 대리인과 대화를 나누면 아직 이런 분위기에 회사는 꽤나 존재한다. 시대가 변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건 자신의 경험이 오랜 습관이 되어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딜 가나 사람이 문제고 사람이 답이라는 것을 다시 느꼈다.


앞으로도 일을 하다가 문제가 발생되면 그건 모두 내 탓이 될 거라는 것을 깨달으니 더 이상 이곳에서 버티며 해내야겠다는 강한 의지는 꺼져버렸다. '3월 말까지만 할게요.'라고 통보했다. 법인세까진 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전표를 치지 못했으니 최선을 다해 입력할 마음을 먹었다. 어딜 가나 시작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끝맺음이 말이다. 내가 있던 자리에서 욕은 먹지 않고 그만둘 생각으로 3월 말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믿지 않는 분위기. 그럼 뭐 어떠한가. 내 마음이 편해진 것을.


혼자 시간이 필요해

언제고 사표를 낼 마음으로 출근을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잘 보일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고, 그저 주어진 일을 구멍 내지 않고 마무리해야겠다는 책임감만 남았다. 계획형이었던 내가 무계획형이 되어버린 게 회사 분위기 탓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무엇을 하랴. 계획이 계속 무시당하면 계획을 세울 의지조차 사라진다는 것을 여전히 모른다. 마이웨이. 그렇다면 3월 말 내 계획을 중심으로 조금씩 정리해 가는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경력을 쌓는 게 목표였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행복이다. 한편으론 여전히 불안감이 엄습한다. '마흔이 넘은 내가 어디로 이직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당연히 한다. 하지만 어디 이 한 몸 갈 곳이 없으랴. 공격적 이직 활동을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철저한 계획으로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다. 사실 최저 임금이라 아쉬울 것도 없다.


얼마 전 업종은 다르지만 회사 내 직장인 괴롭힘을 당해 힘들다는 인친의 디엠을 받았다. 너무 괴로워 보였다. 최선을 다해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그녀는 퇴사를 결정했다. 또 어떤 인친은 나와 비슷한 상황에 출근이 괴롭고 무섭다고 했다. 신입이라 아무것도 모르는데 일만 시킨다고 했다. 하지만 나를 보며 힘을 얻는다고 말한다. 이런 대화를 읽다 보면 여전히 마흔의 경력단절 주부가 사회로 나가 일을 시작한다는 게 녹록지 않음을 느낀다. 하지만 우린 알아야 한다. 어느 곳에서도 사람취급 못 받는 상황에 우리를 던져둬서는 안 된다.


- 경력단절이 죄인인가? 아니다! 우린 최선을 다해 가정과 육아를 일궈낸 멋진 아내이고 엄마다.


- 사십 대의 신입이 되려는 게 죄인인가? 아니다! 주변에 지인이나 친구가 사십이 넘어 취직을 한다고 차자! 우린 아낌없이 응원할 것이다. 이건 응원받고 축하받아 마땅한 일이며 사회로 다시 나가는 우리가 당당해져야 할 이유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느 회사에서든 부당함과 편견, 차별엔 당당하게 대해야 그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우리를 만들 수 있다. 경력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에 자신을 저 깊은 우물 안으로 밀어 넣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야 그 길을 걸어온 내가 꼭 말해 주고 싶은 이야기다. 괴로운 상황, 두려운 상황, 아픈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건 타인이 아닌 바로 자신이라는 것만 꼭 기억하며 오늘도 멋지게 해낸 우리에게 칭찬을 아낌없이 해줄 수 있는 하루를 보내면 좋겠다.






P.S

그동안 연재한 글을 읽어 봤습니다. 많이 부족하고 부정적인 글이 대부분이지만 이곳에서 연재를 하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1년이란 기간을 일하며 동안 마음이 많이 힘들었을 내게 우선 칭찬을 보내고 싶네요.^^;;

어디선가 저보다 더 힘든 상황에 매일 밤 눈물을 흘리는 분이 계시다면 당당해지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가스라이팅 당하지 말고 자신의 내면을 깊이 있게 바라보길 바랍니다.

신입으로 입사해서 혹여나 저처럼 막막하고 어디 물어볼 때도 없는 분이 계시다면 조금이나마 저의 글이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음 편부터는 업무적인 이야기를 좀 나눠 보려고 합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한분 한분 감사드립니다.


추운 날씨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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