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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림 Aug 09. 2021

인간은 죽음 앞에 한 없이 작아진다.

불현듯 쏟아지는 슬픔에 대하여

짜디 짠 바닷바람이 코를 간지럼 핀다.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통영. 태생부터 친가가 없던 나의 어린 시절 유일한 친척이라곤 통영 바다 근처에 자리 잡았던 외할머니 댁이 전부였다. 나는 딸아이와 같은 나이 열 살에 친척이 생겼다.


친정엄마는 자신이 핏덩이 아이일 때 헤어진 엄마(외할머니)를 스무 살 어느 해에 인생 2막을 시작하기 직전 생각지도 못 한 곳에서 극적인 조우를 했다. 만남의 기쁨도 잠시 엄마가 나를 낳으시면서 아빠와 이별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 얻은 슬픔과 괴로움을 잊기 위해 또한 '아팠던 나'를 살리기 위해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자신의 엄마와 이별하게 되었다. 그리고 친척은 없을 줄만 알았던 내게 열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외삼촌과 동생이 생겼다. 삶의 가난보다 인간관계의 굶주림이 더 가슴 아렸던 어린 내게 누구보다 든든한 백이 생긴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 그리고 마흔의 나.  지금 그 사이 길게 자리 잡은 어두운 터널에 갇힌 느낌이다.

친정엄마 빼고 게 주어진 혈연은 외할머니와 삼촌 그리고 외사촌 동생 둘이 전부인데... 나를 아껴주시던 외할머니와 영원한 이별을 했다.




시간은 잡을 수가 없구나.

Rrrr... Rrrr...


새벽 2시가 조금 넘은 시간. 몇 달 전부터 김해에 계신 삼촌과 동생에게 걸려오는 전화벨이 울리기라도 하면 엄마와 난 긴장해 온 몸이 굳었다. 혹시나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을 수화기 너머로 듣게 될까 봐. 그렇게 듣고 싶지 않던 동생에게서 걸려온 전화벨이 울렸다.


밤을 끝으로 잠에 빠져들어야 할 새벽에 전화라니. 수화기 너머로 아직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지만 온몸이 굳고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뭔 일이고? 뭔 일 있나?"


동생이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불행의 예감은 어김없이 나의 심장 과녁 정 중간에 내리 꽂혔다.


"누나...... 할머니가... 가셨... 다."


가셨다... 든 것을 담고 있는 단어. 생명의 끝이 다가오면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는 죽음이 바로 내 앞에 툭 하고 떨어진 것이다.


향년 93세의 나이로 홀로 자식을 키우셨지만 정작 자신의 가는 그 순간마저 자식들에게 보여주기 싫으셨는지 그렇게 홀연히 하늘의 별이 되셨다.




오래전부터 할머니의 연세를 생각하며 많은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돌렸다. 할머니의 죽음이 다가오면 먼 김해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 남편은 함께 가야 하는 것인지, 아픈 엄마는 또 어떻게 모셔 가야 할지 미리 예상해 놓은 준비된 답들을 머릿속에 정리해 뒀지만 정작 일이 벌어지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고 현실은 생각처럼 돌아가지도 않았다.


당장 새롭게 가족이 된 4개월 새끼 강아지는 동물병원의 여름휴가로 맡길 수 없어 함께 이동해야 했다. 김해에 도착하자마자 애견호텔을 알아보니 접종을 모두 맞지 않아 받아 주지 않았다. 내 가족이 하늘의 별이 되었는데 이깟 동물까지 신경 써야 하나 순간 못 된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가족인 것을. 하는 수 없이 삼촌댁에 울타리를 치고 혼자 둘 수밖에 없었다. 중간중간 장례식장에서 삼촌댁까지 오가며 남편이 전적으로 케어를 도맡았다. 너무나 감사한 사람.


남편은 아내의 할머니임에도 장례식 3일 동안 상주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삼촌의 막내아들은 백령도에 나가 있는 해군 부사관으로 결국 할머니의 장례를 끝까지 참석하지 못했고, 친정엄마는 할머니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했다. 아무리 호상이라도 이제 두 번 다신 자신의 엄마를 볼 수 없다는 슬픔은 삼촌과 친정엄마에게 감출 수 없는 이별의 고통으로 가슴에 파고들었다. 나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삼촌의 첫째 아들 내 사촌 동생 역시 상주로서 최선을 다 했다.


우린 그렇게 장례의 첫째 날을 정신없이 보냈고 이튿날 입관식을 눈앞에 두자 그만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아 버렸다. 한 없는 심해로. 컴컴한 바다 깊숙한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 숨조차 쉽게 쉴 수가 없었다.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게 어쩌면 오만가지 감정들로 일그러지는 각자의 표정들을 감추기에 안성맞춤이 되어버렸다. 마스크가 젖고 너무 울어 머리가 멍해질 때 즈음 입관식이 끝나갔다.


삼베 수의를 곱게 입은 할머니가 누워계셨다.


"고인은 3일간 귀가 열려있다"며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라던 상조의 팀장 말에 우린 한 마디씩 내뱉어야 했다. 무슨 말을 할까. 어떤 말을 해야 이 슬픔과 이별의 안타까움을 온전히 하늘의 별에게 전할 수 있을까.


"엄마... 미안해요. 멀어서 자주 뵙지도 못하고... 흐흐흑... 엄마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흐흑"


"엄마... 내 새끼... 키워줘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엄마... 흐... 흑"


엄마와 삼촌은 그저 죄송하고 또 죄송한 마음이었다. 좋은 기억 행복했던 추억보다 자식으로서 표현 못 한 사랑과 부족했던 지난 모습들만 떠올리셨다. 온통 "미안하다", "죄송하다." 그저 못 해준 것이 사무쳐 울고 또 우시며 연신 사죄의 말을 했다.


"... 할머니... 제가 동생이랑 삼촌 잘... 챙길게요. 우리 엄마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할머니 걱정 안 하시게 잘할게요. 삼촌에게도..."


나도 모르게 생각지도 못 한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저 나는 감사했다. 죄송함보다 엄마를 낳아주셔서 감사했고, 떠나는 할머니가 걱정하실 삼촌과 동생을 잘 보살피겠다 약속드렸다.


"할머니... 길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한테 잘할게요. 할머니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숙모 없이 두 사촌 동생은 할머니 손에 자랐다. 얼마나 감사하고 또 감사했을까. 그 마음이 온통 느껴져 우린 또 그렇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태어나 처음 겪는 입관. 염과 습을 행하는 과정 속에서 옛날 유행가에 "알 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을 건졌잖소."라는 노래의 뜻을 나이 마흔에 온몸으로 실감했다.


93년 평생 몸 편히 마음 편히 사시지 못 했던 할머니는 태어나시며 자신의 운명을 아셨을까. 자신의 마지막 그 임종에 순간조차 자식에게 보여주지도 못 하고 허무하게 가실 거라는 것을. 앙상하게 마른 몸에 삼베옷 하나 걸쳐 입고 떠나시는 그 길을 지켜보니 죽음 앞에 지나온 인생의 허무함이 사무쳤다.


그렇게 입관식이 끝나고 발인을 남겨둔 채 우린 현실로 돌아왔다. 장례의 모든 비용과 상조 정산. 조의금 계산 이게 현실이구나 싶었다. 슬픔은 슬픔대로 묻어두고 산 자는 또 살아내야 하니 이 또한 우리의 몫임을 깨닫는 것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 한 비용에 삼촌의 어깨가 무거웠으리라 생각한 남편은 선뜻 500만 원을 삼촌의 계좌에 입금시켰다.


'부담스럽지만 너무 다행이다.' 내가 처음 든 생각. 내가 먼저 말할 수 없었지만 그동안의 요양비용과 병원비 장례비용까지 삼촌의 부담이 컸을 게 뻔했고 친정엄마는 돈이 없을 것이 당연했기에 남편에게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런데 내가 이런저런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선뜻 큰돈을 입금해줬으니 나와 엄마는 부담스러웠지만 그 돈을 뿌리칠 수 없었다. 감사했고 대단함까지 느껴졌다. 나는 과연 시댁이 계셨다면 선뜻 남편처럼 할 수 있었을까. 한편으로 나의 이기심에 미안함이 느껴졌다.


죽음으로 고인을 보내는 길에 슬픔도 현실도 한없이 작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람 한 명 없는 새벽 장례식장. 고요하고 서늘했다. 발인을 앞둔 깊은 밤 향이 꺼질세라 혹시나 잠이 들까 봐 나는 알람을 20분 간격으로 맞춰두고 계속 향을 피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건 뿐이었으니까. 슬며시 눈이 감 킬 때 즈음 할머니의 미소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어렴풋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림아... 고맙데이... "


이건 착각인가 환상인가. 아니면 꿈이었을까. 조용한 장례식장 나는 그저 불현듯 쏟아지는 슬픔에 울고 있었다. 그리고 파노라마처럼 할머니와의 추억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할머니와 함께했던 통영의 중앙시장과 통영의 바다에 짠 냄새, 할머니가 해주셨던 도루묵찌개, 할머니와 함께 했던 목욕탕 그리고 방학이면 할머니 집에서만 즐길 수 있었던 공포영화. 그런 나를 위해 과일을 정성스레 깎아주시는 할머니의 모습들이 사진의 한 장면들처럼 마구 떠올랐다. 가슴이 아렸다. 목소리를 듣고 싶고 안고 싶고 냄새가 그리워졌다.
이젠 다신 볼 수 없는 할머니가 되어버렸다.
꾸역꾸역 참아왔던 슬픔이 터져버린 순간이었다.

눈물을 쏟아내니 또다시 잠잠해지는 마음에 순간 미소가 퍼졌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간사함이라니. 죽음 앞에 남겨진 사람은 무엇도 할 수가 없구나 싶었다. 그저 받아들이고 온전히 보내는 것 밖에 할 수가 없구나. 신이 있다면 얼마나 인간이 한없이 작게 느껴 질까 생각했다.


드디어 할머니를 보내는 발인의 시간. 우리 가족은 그렇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할머니를 보내고 있었다. 우리의 눈물이 강이 되어 온전히 보내 드릴 수 있다면 바랄게 무엇이 있을까. 더 울어 드리지 못해 미안해질 뿐.


할머니는 이제 떠나셨다. 새로운 세상으로 그리고 다시 어디에선가 또 태어나시기를. 죽음 앞에 인간은 한없이 작아지고 불현듯 쏟아지는 슬픔에 그 작은 인간은 무엇도 할 수 없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음을 느끼는 아픈 시간이었다. 나는 아직도 불현듯 슬픔이 밀려온다. 친정엄마도 괜찮은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것 같다가도 작은 것 하나에 눈물이 쏟아진다.


나는 막연한 두려움이 생겼다. 이 슬픔, 이 아픔... 죽음이라는 것을 마주 하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 나이 서른이 되면서 친정엄마의 장례를 생각한 적이 많았다. 어떻게 보내야 할지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맏딸이자 외동인 내가 그 모든 걸 해내한다는 책임감에 계획들도 세워놨다. 하지만 죽음이 코앞에 다가와보니 그저 인간은 작고 죽음은 한없이 큰 존재였다. 그래서 난 두렵다. 다가올 엄마와의 이별이 최대한 천천히 오길. 운이 좋다면 백세 인생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많이! 나와 함께 하기를. 모두가 맞이해야 하는 죽음 앞에 간절하게 소원해 본다.


제발 인간의 미약함을 느낀 죽음이여 최대한 그리고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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