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생의 결혼이야기
1916년생인 나의 외할머니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당신이 10살도 되기 전, 보쌈이란 관습으로 재가를 하신 모친인 나의 증조외할머니 대신 파평 윤 씨 집성촌인 작은 시골마을에서 작은 아버지 즉 삼촌집에서 결혼 전까지 사셨다고 한다. 그리고 외할머니의 할아버지도 그녀를 예뻐하셨다고. 정말 다행이다. 나의 외할머니는 장녀이자 외딸인 나의 엄마한테도 엄청 마음을 쓰시고 잘 보살피셨는데 아마 당신의 어린 시절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자라나 자녀들에게 헌신하신 게 아닌가 생각한다.
당시의 우리나라는 여전히 농업으로 살아가는 경제구조라 말 그대로 대가족 즉 최소한 3대 이상이 한 집에서 거주하거나 같은 마을에 살아가는 가족형태였다. 100년이 지난 현재의 우리 가족구조와 삶의 형태를 비교하면 너무 피곤한 삶일 것 같아 이런 가족관계의 구조속에서 자라지 못한 MZ세대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외할머니는 어릴 적 사촌들과 친하게 지내고 삼촌의 보살핌으로 힘들게 살았다는 얘기는 하지 않으셨다. 생전에도 그 어릴 적 사촌들과도 꽤 사이좋게 서로 도와주며 잘 지내셨다.
요즘의 가족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건 재산인 것 같다. 할아버지의 재산, 부모님의 재산, 상속을 누구에게 더 많이 하는가에 따라 가족 간의 분란이 끊이질 않고 며느리며 사위들도 가세해 가족이란 이유로 따뜻한 정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깨어지는 경우가 많아 참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100년 전엔 사회전반적으로 빈곤지수가 높았지만 여전히 사회윤리의 핵심이었을 성리학 즉 유교사상이 작동하고 있어 그나마 인간도리나 정이 살아있었던 사회였지만 그때와 지금은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는가?
1910년생인 외할아버지는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철도기술을 익힌 기술자였다 한다. 결혼을 위해 외할머니를 보러 H면으로 오셨는데 우물가에서 물을 긷는 16살 외할머니의 곱게 땋은 윤기 있는 검은 머리채를 보고 맘에 들어 결혼을 결심했다 한다.
외할아버지의 안목은 높으신 것 같다. 외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쪽진 머리를 고수하셨다. 그리고 오랫동안 흰머리가 없으셨고 그녀의 외딸인 나의 어머니도 평생 염색 한 번 안 하시고 사셨다. 물론 새치는 군데군데 있었지만 염색을 하지 않으셔도 될 만큼이라 늘 나의 어머니도 당신 머릿결이 좋으면 다 친정엄마의 유전 덕분이라고 자랑하였다.
나? 나도 아직 흰머리를 가리기 위한 염색은 하지 않는다.
물론 앞 양 정수리에 흰머리가 몇 개씩 보이고 군데군데 새치도 있지만 코팅염색으로 보완하고 있다. 윤기 나는 머릿결과 흰머리가 늦게 나는 건 다 모계혈통이라 생각한다. 나의 하나뿐인 딸도 아마 흰머리가 빨리 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MZ세대라 늘 흰머리를 커버를 위한 염색이 아니라 저만의 헤어칼라로 늘 염색을 하는 건, 뭐 저들만의 패션이거니 생각한다.
결혼 후 일본으로 건너간 외할머니는 장녀인 나의 어머니와 그 아래 3명의 아들을 둔다. 네 자녀 모두 일본 나고야 출생이다. 사실 나는 내 나이 50살 이후까지 이런 사실을 몰랐다.
해방 후인 1945년쯤 외할아버지의 고향인 B면으로 돌아와 일가족을 이루었는데 1949년 농지개혁법으로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빼앗긴 외할아버지는 그 제도에 분을 삭히지 못하고 혼자서 일본으로 가셨다한다. 나고야에서 건축업에 종사하면서 어느 정도 재산을 모으셨다. 아마 그때쯤 외할아버지는 일본 국적을 취득하신 걸로 안다. 당시 일본국적을 취득하려는 조선인(이땐 아직 대한민국이란 나라이름이 익숙지 않아 재일교포 자신들도 조선인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야 했다)들의 직업군은 파친코나 노동자 혹은 식당 등에 종사하는 이들에겐 발급하지 않았다 한다.
외할아버지는 그렇게 일본 이름으로 사업을 하셨다. 그래고 한참 후에 일본에서 일본인 여자랑 재혼하셨다.
외삼촌 2명은 1951년 전쟁 중에 일본으로 밀항을 하셨고 역시 일본 국적을 가지고 살아가셨다.
나의 외할머니는 일본으로 다시 가진 않으셨다.
참고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사이가 좋으셨다 하는데 왜 남편 따라 일본으로 가지 않으셨는지 궁금했다.
내 어머니가 하신 말이다.
" 따라가려고 하니 재가한 친정엄마 즉 증조외할머니와 그 6명의 동생들이 밟혀 못 갔다 하시더라"
일본에서 한국으로 오실 때 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B면에서 유지로 사셨다 한다. 그래서 친정어머니와 아버지가 다른 여동생들을 꽤 많이 보살피셨고 그래서 시어머니의 눈치를 봐야 했다고 나의 어머니는 기억하고 있었다. 재가한 모친이지만 시대적으로 빈곤해 늘 마음을 써 친정어머니인 증조외할머니를 챙기시려고 남편을 따라 일본으로 가지 않으셨다고. 계속 일본으로 오라는 외할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으셨다.
" 야야 나는 그래도 너희 아버지가 재혼할지는 몰랐다. 안 할 거라 생각했다. 사이가 좋았거든. 문디 자석..."
나의 외할머니가 나의 어머니한테 한 말이다.
마음이 아프다. K-장녀의 의무를 하느라 남편을 따르지 못한 나의 외할머니는 정말 열심히 농지를 관리하시며 열심히 사셨다. 친정가족 피붙이들을 보살피며 그녀 나이 33살부터 혼자가 되어 70세 중반까지
내가 딸을 출산한 해가 87년이니 모녀 4대가 같은 세상 같은 공간에 살았는데 그때 미처 모녀 4대의 사진을 남기지 못해 정말 아쉬움이 크다. 시간은 충분했는데 말이다. 이제는 시간이 흐르고 증조할머니에서 손녀까지 4대가 한 공간에 있을 수 있을 기회가 없어지고 있다. 뒤늦게 깨달아 그 아쉬움으로 나는 모녀 3대의 사진을 찍어 놓았다. 내 엄마와 나 그리고 내 딸.
내 어머니는 2020년에 돌아가셨고 내 딸은 아직 미혼이다. 나는 또다시 모녀 3대가 함께 한 사진을 찍어 놓고 싶다. 꼭꼭 이루어 지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