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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토리아 Mar 16. 2024

며느리 지참금은 내 돈이라던
K의 시어머니

1980년 대엔 이랬다우

지난 월요일 남편 고교동문 부인들 4인이 모여 호캉스를 했다.  1박 하는 일은 처음이었지만 그만큼 많은 수다를 들을 수 있었다. 남편동문들은 저 남쪽 지역의 이곳저곳의 시골지역이 고향인 사람들이 많다. 서울 명문대를 나와 이젠 다들 퇴직하여 과거의 영광을 되새김질하면서 살고 있는 듯싶다.

그리고 우리들은 모두 1980년 대 중후반에 다들 결혼, 지금까지 무난히(?) 살아온 60대들이다. 촌출신 남자들의 특징을 말하자면 잔머리를 쓰지 않는다. 도가 넘는 거짓이나 잔꾀는 부리지 않는다. 등등 

하지면 그 시댁 가족들을 이야기하자면 지방소도시 출신인 나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었음을 하룻밤의 수다로 알게 된다.  


K는 활달한 성격으로 서울생활 40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골정서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다. 지방 소도시의 제1의 유지였던 부친의 막대딸로 금수저가 아닌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지금까지도 그 화려한 시절의 얘기를 푸는데 하룻밤도 부족했다. 


K는 결혼 후 10년 사이 일어난 얘기를 풀어놓는다.  그중에서 본인이 결혼할 때 가져온 서울의 아파트 한 채와 지금으로 치면 몇 억이 든 현금 통장. 그녀의 결혼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고. 당시 그녀 나이 22세. 사업가로 자신 인생을 설계했다는 그녀는 어머니의 사위에 후한 평가로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K의 말


" 완전 사기결혼이나 마찬가지였죠 시댁 집안재산이나 가족의 상황이나 인간성이나. 출신 고교나 출신 대학만 빼고"


K의 시댁은 형제자매도 많은데 그녀 남편은 개천에서 난 용이었다. 그 용으로 자라난 남자는 집안의 대소사와 형제자매의 경제적 기둥역할을 맡아야 하는 아들이었다.

결혼 후 바로 본인의 월급은 모두 시댁에 보내고 하물며 사사로이 생기는 모든 돈까지 시어머니에게 보냈다고 한다. 물론 K에게는 한 마디 의논도 없이.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통장에서 생활비를 인출해야 했다고 한다. 남편의 이런 일방적인 행동을 보고 그녀는 그녀 남편한테서 더 이상 결혼에 대한 기대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사실 지금까지 살아계신 시어머니는 98세. 아직도 정정하시고 남편은 여전히 형제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으며 그동안 K 모르게 목돈을 보냈다는 걸 시댁 가면 친척들의 인사치레로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했다.


나는 그녀의 결혼 직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도 그녀는 잘 모르는 나에게도 그랬다.

" 이혼해야겠어요. 이혼할 거예요"

그땐 나도 아주 순진할 때라 감히 이혼은 생각조차 떠올리지 않았던 때라 참으로 의아해했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저렇게 쉽게 이혼이란 말을 할까?" 하고.  

그녀는 용감했다.  물론 그녀의 뒷배경이 되어준 친정아버지가 있었기에 가능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아주 생활력이 뛰어난 사업가 기질의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자신만의 결단이었다.  물론 실행은 안 했지만.


K의 시어머니는 K의 재산에 대해 일일이 간섭했다고 한다. 그녀는 평수가 큰 아파트를 사도 이사를 가지 않고 그냥 작은 평수에 기거한다 두 채의 아파트를 소유한 그녀가 무척 부럽다고 느낀다. 큰 평수를 산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시어머니는 노발대발했다 한다. 시골 사는 시부모는 수시로 K의 집을 오르내렸으며 서울에 대학은 다니는 시댁 조카들도 몇 년을 데리고 살아야 했다.

그녀는 겁이 났다고 한다.  50평대 아파트를 사 준 친정아버지의 바람은 막대딸인 그녀가 좀 편히 살아갔으면 했지만 평수가 늘어나면 그 밖의 친척들이 들락날락하는 걸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그 외 시어머니의 아들자랑과 며느리 재산에 대한 욕심, 손녀에 대한 푸대접 등등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그녀는 그 후 오빠의 부도로 부모가 사 준 아파트 2채를 날리고 30년간 직장생활을 하며 자신만의 경제적 자립을 이루었다. 대단한 능력의 K여사. 


우리 시대의 며느리는 그랬다.

시어머니에게 말대꾸를 하는 것은 엄청나게 본대 없는 집안이라 친정을 욕먹이는 일이라고 늘 주의를 준 친정부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시대는 변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딸에게 하면  " 웬 외계인 나라 얘기?"라고 한다.

요즘에 사 느끼는 건 역시 

  " 사람은 나서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야 한다"이다.

서울남자의 결혼한 친구들은 우리 4인방이 겪은 그런 고충은 별로 없었다고 해서 부러웠다.

서울과 지방과 시골 사는 사람의 의식 수준차, 아들선호, 남성우월, 가부장제 등 그 격차가 여전히 심하다.


아직 우리 집엔 가부장제에 젖어 청소기 한 번도 돌리지 않는 할배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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