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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토리아 Mar 20. 2024

남자바라기였던 한 여성의 생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

  1925년 출생, 2020년 사망한 여성이 있다. 

95세까지 살았지만 늘 자신의 존개를 남자, 즉 남편, 아들, 손자에게서 인정받길 원했던 분이다.

그녀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며느리의 입장으로서 분노를 느껴 그녀의 며느리였던 G여사가 평소의 조용조용한 말투와 온화한 태도가 거의 절망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3남 1녀를 두었으며 그들은 모두 60대이다. 

아들들은 서울 명문대를 졸업했고 또한 한 아들은 박사연구원이다.

그녀가 시집간 곳은 6.25 전쟁 당시 마을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지리산 깊은 산속이라 전쟁의 피해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빈농은 아니라 나름 마을의 유지였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세상을 뜰 때까지 문맹상태였다고 한다. 즉 한글을 읽거나 쓰지 못한 것이다. 

95세까지 사셨는데 4남매 아무도 그녀에게 한글을 쓰고 읽을 기회를 만들어 주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그 당시 아직도 일제 식민지였던 시대로 돌아가면 그녀는 해방 전에 이미 결혼 10대 후반에 결혼을 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결혼 후 10년 만에 첫아들을 보고 그 이후 3남매를 더 보았으나 첫아들을 낳기까지의 10년 동안 마음고생이 엄청 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남편이 집안의 장남이었기에 더욱더 심적 고통은 컸을 것이다. 그렇게 10년 만에 낳은 장남은 또 얼마나 귀할 것이며 애지중지하였을지 상상되고도 남는다.

그녀는 한 번도 혼자서 시장을 다녀온 적이 없다 한다.  시골 장날이나 제사준비를 하기 위해 장을 볼 때도 늘 그녀 남편이 봐왔으며 같이 장을 보러 가지 못했다 한다.

그녀 남편의 입장에서 보면 중매로 결혼한 아내가 글을 모르다? 아마 그 시대의 교육제도를 본다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일제강점기엔 소학교가 있었지만 학비가 비싸 소작농 자녀는 거의 다닐 수 없었고 일제의 우민화정책에 의해 여자아이의 학교진학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아직도 문맹인 할머니들의 한글습득을 위한 교실을 마련, 한글을 익힌 분들이 지은 시가  sns에 올라오는데 그중 유명한 건 <칠곡할머니>이다.

그러기에 그녀의 문맹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남편의 홀대나 자식들과의 소통에서 아마 조금씩 그녀의 자존감은 떨어졌을 수도 있다.


  G여사의 남편은 장남이다.  바로 그녀, 그녀의 천금 같은 첫아들이자 타고난 효자인 남자. 이 장남은 회사 퇴직 전까지 거의 해외건축현장에서 일하여 30년 퇴직 전까지  G여사와 같이 산 세월은 3년 남짓이었다고 한다.

1년에 한 달의 휴가는 시골본가에 가서 부모님이랑 같이 있거나 서울의 아들집에 와서 같이 생활했다고 한다.

다행히 G여사는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고 2녀 1남을 둔다. 막내아들은 누나들과 10살 이상 차이가 난다.

G여사는 서울토박이였다. 소개받은 남편이 시골집과 정경과 가족얘기를 할 때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에 호기심이 갔고 남편 또한 선한 심성의 소유자라 마음이 움직였다고 했다.  그러나

늘 떨어져 있는 남편 대신 시골본가을 오가며 제사와 시부모봉양과 그 모든 것은 다 해낸 여성이다. 하지만 그런 노동은 그리 힘든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고 한다.

시어머니인 그녀는 그녀의 두 손녀들에게 수시로 한 말들에 대해 대꾸도 못하고 속만 상했다고 한다.


" 쓸데없는 저것들 보기 싫으니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해"

" 저것들한테 돈 들일 필요 없어. 다 남 좋은 일 시킨다"

" 하나도 쓸데없는 년들"


이런 무자비한 언어학대를 만나면 수시로 했는데 G여사는 시어머니와 맞설 엄두를 내지 못했고 그것이 지금도 너무 미안하게 느낀다고 했다. G여사는 지금 두 딸 가까이 살며 손자와 손녀들을 수시로 돌봐주고 있다.


G여사의 남편은 퇴직한 후 혼자 남은 그녀를 모시고 살았다.  G여사와 30년 만에 같은 집에서 줄곧 같이 밥 먹고 같이 생활한 건 맞지만 그나마 G여사에게 다행인 것은 치매였던 시어머니와 남편이 한 방에서 기거하고 남편이 자신의 어머니를 돌봤다는 것이다. G여사는 결혼 35년 만에 더 이상 시어머니의 수발드는 일에서 벗어나 혼자 잠을 자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인 시어머니 입장에서 다행인 것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장남이 1년에 단 한 번 볼 수 있었는데 같은 집에서 같은 밤에서 같이 자는 것 만으로 얼마나 그녀는 좋았을까?  원 없이 사랑하는 아들과 한집에서 살고  남편에게서 존중을 받진 못했지만 장남과 한 방에서 5년을 같이 살고 금쪽같은 손자도 한없이 이뻐한 후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늦둥이 막내아들은 G여사가 잠시 휴가를 남편이 있는 중동현장으로 간 사이 들어섰다 한다. 우연히.  절대 의도적이진 않았다고 하지만 시어머니인 그녀는 얼마나 기뻐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녀에게 있어서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고 장남의 입장으로서도 효도를 했다고 여길 것이다. G여사는 얼마나 인고의 시간을 보냈는지 지금 그녀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안타깝다.  신혼 때 본 그녀의 선한 미소는 참 보기 좋았는데 지금은 참 많이 상한 느낌의 미소를 보여줘 속이 상했다.


  여성인 우리는, 여성인 우리 딸들은, 여성인 우리 손녀들은 절대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무시당하거나 하대를 당해서는 안된다. 시대가 변했다. 많이 변했다. 다행히도.

하지만 젠더로 차별하는 우리들의 의식은 곳곳에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여성으로서 우리는 남성으로부터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무의식적인 노력은 의식적으로도 차단해야 한다.

나도 늘 남편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노력은 많이 했다. 그렇게 해야 된다고, 그건 나의 모친이 부친에게 해오던 가부장제 관습을 답습한 것이었다. 나를 인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며 그 다른 누구도 아니라는 걸 늦은 나이 60이 넘어서야 깨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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