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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토리아 Apr 21. 2024

무임승차로 먹은 보약 한 팩

  결혼 40년이 지나 이제야 남자가 데워준 보약을 먹었다.

데워 주었다기보다는 머그컵에 담긴 한약 한 봉지에 전기포터 안의 뜨거운 물을 100cc 부어주기만 했다.

전기포터의 뜨거운 물은 이미 내가 물을 넣고 스위치까지 눌러 이미 다 끓은 상태였고.

그래도 무척 성공한 나의 계책에 혼자 미소 지었다. 

이 사소한 사건으로 내가 웃은 이유를 적는다.


  우리 부부는 결혼 40년을 작년에 맞이했다.  40년을 함께 살아온 남녀이다.

지금은 생각도 못할 나이 23세에 나는 그 남자와 결혼했다.

23세. 

세상을 다 아는 것 같기도 했고 앞날에 대한 희망도 가득 찼던,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가졌던, 

열심히 하면 내가 원하는 걸 많이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내가 하는 판단은 늘 옳다고 여겼던,

세상이치를 무척이나 알지 못했던 나이였다는 걸 이제 안다.


그 남자 28세.

그 또한 그 나이에 무얼 제대로 알고 있었으랴...


  젊은 날부터 우리는 봄가을로 한방보약을 먹었다.  둘의 체중을 합하면 100킬로를 넘지 않았으니 친정엄마는 늘 우리에게 건강을 위한 여러 가지 건강식품인 개소주와 흑염소 그리고 녹용이 든 한방약을 보내주셨다.

아침저녁 2회 보약 먹기를 즐기는 그 남자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 약발이 제대로 들으려면 정성으로 당신이 약을 데워서 줘야지"


그래서 나는 아침 출근길에 아침밥 차리고 애들 봐주고 밥 먹이고 그리고 그 남자의 한약을 데워 봉지 끝도 잘라먹기 좋게 준비해 줬다. 건강해야 서로에게 좋으니까.  아무 의심 없이 정성으로 데워줬다.

한약을 대령하지 않으면 스스로는 절대 데워먹지 않고 나가는 남자라 어쩔 수 없이 그 바쁜 아침시간에도 해야 했다. 뭐......이! 내가 너무 무지했다.  나 스스로 아내의 가치를 노동력만으로 인정받고자 했던 것이다.


 35년을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고 살았고 은퇴 이후 몇 년간은 보약을 먹지 않았다. 힘들게 일하지 않으니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60대 중반에 이르러 나 또한 조금씩 기력이 떨어지는 걸 느껴 나를 위한 보약을 스스로 먹어야 되겠다는 생각에 경동시장 한약국에 가서 녹용이 든 보약을 조제하고 후후후 그 남자약도 한 접 같이 지어왔다. 그날 밤 나는 생각했다. 

 

'그동안 내가 약을 늘 데워졌으니 나도 이제 데운 약을 한 번 받아먹어보자'

'하지만 어떻게 해야 되지? 내가 데워달라고 하면 이렇게 말할텐데...그걸 내가 왜 해? 지 약은 지가 먹어야지. 그것도 짜증 나는 투로 말하겠지?'

'그럼 내가 너무 화가 날텐데...진정하고 ...내가 지금껏 당신 약을 30년 데워졌으니 나도 함 받아보고 싶다고요...라고 말해야지'


자기애적 성향이 강한 남자는 쉽사리 여자의 말에 대해 긍정적 대응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올 수 있는 대화유형의 사전연습이 필요했다.  기회가 오면 써먹을 준비를 한 것이다.

바로 오늘 아침이다.

보약 먹기를 좋아하는 남자는 자기 약 한 첩을 컵에 넣고 물을 붓길래 나도 준비된 한 마디를 했다.


" 내 약에도 물 좀 넣어 주세요."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 왜 무임승차 하려고 그래?"

담담한 어조로 지난밤 준비된 말을 건넨다.

" 아이고~~내가 지금까지 당신 약을 얼마나 데워졌는데 나도 이제 받고 싶소. 나도 나이 들었단 말이요"

그랬더니  식탁 위에 뜨거운 물을 부운 약봉지가 든 머그컵을 갖다 준다.

성공~~~~

내가 부탁하거나 해달라는 것에 토를 붙이지 않고 해 주는 것이 없는 그 남자.

컴에 데운 물 한 잔 부워달라는 것도 무임승차라고 말하는 그 남자.

그렇게 데운 보약 한 팩 먹은 오늘 아침이다. 기운 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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