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한산성> 읽기
조선이 청나라의 신하가 되어야 했던 역사. 영화 <남한산성>의 배경인 병자호란 이야기다. 있어서는 안 되는 현실이지만 결과적으로 있었던 현실. 영화는 결과가 있기까지의 과정을 돌이켜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이조판서 최명길과 예조판서 김상헌, 나라와 백성을 살리기 위한 두 충신의 치열한 공방은 그 결과를 떠나 한 번쯤 되짚어 보고 싶게 했다.
청의 신하가 되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니 끝까지 맞서 싸우겠다는, 죽음에도 아름다운 자리가 있다는 김상헌. 치욕은 견딜 수 있지만 죽음은 견딜 수 없으니 적의 아가리 속에서라도 삶의 길을 찾겠다는 최명길. 그는 김상헌이 중요히 여기는 대의와 명분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는다. 백성들이 죽은 후에 대의와 명분이 무슨 소용이냐는 것. 살아남아야 대의와 명분도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 공방에는 싸움의 판세도 작용을 했다 김상헌은 최명길이 싸워보지도 않고 이미 패배를 인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뻔히 패배가 보일 만큼 싸움의 판세가 청 쪽으로 기울었다면 최명길의 주장 역시 일리가 있어 보였다. 김상헌은 이미 기울어진 판세라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영화에서 김상헌이 지원군들에게 전하려던 격서가 제대로 전달되었더라면 싸움의 판세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 공방의 핵심은 ‘삶’이다.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 것이며 삶에서 무엇을 중요히 여기느냐의 문제. 최명길의 경우는 청의 신하가 되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살아남는 것이 앞으로의 삶을 도모할 수 있으니 중요한 것이고, 김상헌의 경우는 청의 신하가 된다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살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겠다는 것이다.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살리겠다는 두 충신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결정권자였던 인조는 두 충신의 뜻을 모두 선택했다. 김상헌에게는 적에 맞서 가능한 싸움을 준비할 것을, 최명길에게는 청의 신하가 되겠다는 답서를 보내도록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김상헌이 꾀했던 싸움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최명길의 답신이 전달됨으로써 더 이상 백성들의 죽음은 막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조를 비롯한 그들 위정자들은 백성들을 살린 것인가. 조선은 청의 신하가 되었지만 최명길의 뜻대로 더 이상의 백성들의 죽음은 면하였으니 백성들을 살린 것인가. 아니면 김상헌의 뜻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청의 신하가 되었으니 살아도 산 것이 아닌가.
적의 아가리 속에서도 삶의 길은 있다고 했던 최명길은 “지독한 겨울을 견뎌낸 자만이 봄을 맞이할 수 있다”는 말로 앞날을 도모할 채비를 한다. 김상헌은 최명길에게 “옛 것을 버려야 새로운 것을 찾는다. 나도 그대도 심지어 이 나라의 왕까지도”라는 말을 남기고 자결한다. 이제 백성들은 살아남은 최명길을 따라 겨울을 견뎌내고 봄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김상헌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백성들을 살리지 못했다는 책임감에 자결했다. 죽어 버린 김상헌이 굽히지 않았던 그 뜻은 무엇일까. 버려야 할 옛 것은 무엇을 의미했던 것일까. 그들 위정자들이 살리려 했던 백성들의 목소리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선에서 노비는 사람이 아니오. 더는 내게 조선 사람이라 하지 마시오”(청의 장수가 된 정명수), “난 벼슬아치를 믿지 않소”, “전 다만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거두어 겨울에 배를 곯지 않는 세상을 바랄 뿐이옵니다”(대장장이 서날쇠) “난 누구의 편도 아니오 다만 다가오는 적의 목을 거둘 뿐이오”(이시백장군) 자신의 권세를 떠나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 바쳐 국정에 임했고, 신분을 넘어 옳다고 판단되면 대장장이의 목소리지만 국정에 반영하려 했던 김상헌의 모습을 떠 올려보면 그가 말한 사라져야 할 ‘옛 것’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파벌 싸움을 일삼고 백성들의 삶과 목소리를 외면했던 위정자들일 것이다.
만일 김상헌이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나라와 백성들을 살리는 대의와 명분이 그런 것이었다면, 백성들이 한 나라의 주인으로 살게 하고 자신들의 삶과 죽음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면, 진즉에 김상헌이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한 것은, 살아남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죽어버린 것은 안타깝다. 다만 살아남은 최명길 역시 진정으로 나라와 백성들을 위한다면 김상헌의 뜻을 살려줄 것이라고 믿고 바랄 뿐이다.
2017. 10.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