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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Oct 25. 2023

전쟁을 위하여

1     


전쟁의 희생자로 그려지는 영화 <플래툰>의 순진한 청년 크리스는 할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전쟁이라는 생지옥을 겪으면서 인간적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순진한 시선은 선과 악이라는 도식적인 이분법으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다. 서로 죽여야만 하는 죽일 수밖에 없는 전쟁 같은 모순적 상황이 발생하는 원인을 보여주지 않는 한 세상에는 우리 편과 나쁜 편만이 존재하며 그것도 우리 편이니까 우리 편이며 나쁜 편이니까 나쁜 편일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도 미군이니까 우리 편이고 우리 편이니까 착한 사람이고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베트콩들은 적이니까 나쁜 사람이라는 공식으로 장면들은 채워진다. 전쟁터에서는 그런 순진한 이분법적 시선을 유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전쟁터에선 그렇다. 현실의 전쟁터를 만들지 않으려는 싸움에서는 순진한 시선은 위험하다. 적이 왜 우리 편이 아닌지 부단히 문제 삼을 때 전쟁터는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편이 민간인에 대해 저지르는 학살⋅강간⋅폭력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으며 적이 먼저 우리 편을 공격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은 정당한 폭력으로 귀결된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은 살려준다는 식의 휴머니즘이 비장한 음악의 도움을 받으며 연출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도 전쟁 속에 던져진 청년들의 희생을 보여줄 뿐 베트콩은 그들 젊은이들의 적일 뿐이다.      


왜 그들이 그런 전쟁을 겪어야 하는지 누가 왜 그런 전쟁을 일으킨 것인지 묻지 않는다. 나쁜 어른들에 의해서 벌어진 전쟁을 겪으며 크리스는 얼마나 성장했을까. 크리스의 성장은 전쟁에 대해, 전쟁을 일으킨 나쁜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전쟁에 꼭 참전해야 하는지에 대해, 군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때 시작될 것이다. 그것이 전쟁을 막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2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7월 4일생>은 전쟁놀이를 좋아하던 어린아이가 전쟁영웅을 꿈꾸다 해병대에 자원하고 결국 그 꿈으로 인해 인생의 파멸을 맞는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쟁에서 불구가 되어 돌아온 코빅을 맞아주는 것은 역시 국가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릴 적 꿈의 원천은 애국심이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나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기 전에 내가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라던 대통령의 가르침에 따라 불구가 되었고 그 대가로 가슴에 훈장을 단다. 하지만 친구도, 옛 연인도, 가족마저도 영웅을 대하는 태도는 냉담하다. 반전운동이 거세지고 있었던 것이다. 분위기에 휩쓸려 전쟁영웅 코빅이 반전운동을 벌이는 모습은 어색해 보인다. 어색함의 이유는 코빅 역시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반전운동은 전쟁을 일으킨 미국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반대하는 정의로운 미군에게 상처를 준 베트남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전쟁은 나쁜 것이고 그래서 전쟁은 나쁜 사람들이 일으키는 것인데 미국은 나쁜 사람일 수 없으니 나쁜 사람은 베트콩일 수밖에 없다는 식이다.      


영화는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상처 입은 영웅 코빅, 아니 미국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코빅의 비극은 국가에 이용당하고 버림받았다는 것이며 더 큰 비극은 코빅의 반전운동이 미국행정부를 향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국가행정부가 누구냐에 따라 국민을 전쟁의 제물로 삼아 국민들의 삶을 파멸로 이르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코빅의 슬픈 희생을 보면서 아이들에게 일상적으로 평화에 대한 꿈을 심어주는 것이 진정으로 애국을 하는 것이 아닌지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닌지 새삼 묻게 된다.           



3     


<우리는 군인이었다>나 <플래툰>에서는 전쟁에 참전한 젊은이들이 하층민이나 흑인이라는 사실이 불평의 형식으로 언급되는데 미국 사회 내의 계층 갈등이나 인종차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군인이었다>에서는 북베트남 병사가 자살폭탄 배낭을 메고 미군 지휘소에 뛰어드는데 유색인을 광기 어린 존재로 보이게 만드는 데 충분해 보인다.      


베트콩들은 야만적인 러시안룰렛게임을 즐기고(<디어헌터>) 베트남 젊은이들은 거리에서 미군들의 카메라를 날치기하는(<풀메탈재킷>) 등 저급한 존재로 그려진다. 또한 베트남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병사들과 흥정하는 매춘부로 묘사된다.(<풀메탈재킷>) 그러한 묘사는 자신들의 시선으로 타자를 재단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그러한 폭력적 시선은 자신들보다 열등하다고 여기는 민족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쟁을 취재하는 기자들을 제지하며 취재기자들과 언쟁을 벌이는 장면들(<햄버거힐>)은 전쟁을 한낱 기사거리로 삼는 것에 대한, 실재를 재현하겠다는 미디어가 실재를 가린다는 비판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4     


이상의 영화들은 반전영화를 표방하면서 비판적인 시각으로 재현하고 있는 인도주의적인 전쟁비판, 미국 내 계층 갈등, 백인의 유색인에 대한 인종차별, 남성의 여성에 대한 성차별, 미디어에 대한 비판, 한편으로는 전쟁에 패배함으로써가 아니라 전쟁에 승리하지 못함으로써(만일 베트남전쟁을 미국이 승리했더라면!?)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국가 미국의 상처 입은 자존심을 치유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영화에서 보이는 미군들의 모습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미국 사회 속에 침투해 있는 일상적인 이데올로기가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비판은 전쟁을 반대하는 의미 있는 작업으로 보이기도 한다. 일상적인 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각종 차 별들, 그런 차별들이 가능한 현실이 전쟁마저도 가능하게 할 수 있으며 그런 차별과 폭력에 무감한 이상 전쟁이라는 폭력에 무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전쟁의 위협이 계속되는 이유는 정치⋅경제적 이익이다. 유색인, 약소 민족에 대한 수탈이 야만적이라는 생각이 자신의 정치⋅경제적 이익에 가려지는 이상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일상적으로 각인된 그러한 차별에 대한 인식 부재로 인한 감각의 마비가 전쟁마저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5     


<풀 메탈 재킷>은 군대라는 국가 장치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전사(戰士)로 사육되는지 군대의 폭력성을 통해 보여준다. 군대에서 신병들은 똑같은 헤어스타일과 패션으로 획일화된다.(물론 그 속에도 ‘사이비개성’은 존재한다) 더 이상 자신의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지 않으며 ‘카우보이’나 ‘조커’등의 별명으로 불린다.(신병들은 번호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개인의 고유성은 말살된다.      


무엇보다 군대에서 신병들은 자신이 달성해야 할 유일한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만(적을 죽이는 일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며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 단지 위에서 시키는 대로 목적을 수행하는 기계적인 존재로 변해갈 뿐이다. 교관 하트만은 흑인(nigger), 베트남인(gooks), 이탈리아 이민자(wops)등을 인간 이하의 존재임을 주입시킨다.      


그 이유는 그들이 미해병의 적이기 때문이다. 적인 이유는 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병들의 ‘여성성’을 제거함

으로써 여성 또한 해병대의 적으로 만든다. 여성성은 적을 무찌르기에 나약한 성질이기 때문이다. 하트만의 훈련성과는 신병인 파일을 통해서 바로 확인된다. 적응하는 게 이상해 보이는 군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는 고문관이라고 불린다. 그런 고문관은 동료들이 동료애를 발휘하여 챙겨주면 될 것인데 오히려 놀림감이 된다.      


결국 파일은 동료들과 하트만의 가학과 따돌림을 견디지 못하고 하트만에게 훈련받은 전투력으로 하트만을 죽여 버린다. 개인의 고유한 의식과 도덕적 감각을 마비시킴으로써 적을 살해하는 살인자를 길러내는 것이 군대의 목적이라면 하트만은 목적에 실패한 것이다. 적이 아니라 자신을 살해했으니 말이다. 그것이 군대가 안고 있는 모순일 것이다. 즉, 자신의 행위 목적에 대해 반성할 수 없는, 반성해서는 안 되는 맹목성이 하트만과 파일 모두를 파멸로 몰아간 것이다. 군대가 그런 파멸의 연습장이라면 전쟁터는 파멸의 실전장일뿐이다.           


6     


“우리가 이곳에서 베트남인들을 돕는 것은 모든 베트남인들이 마음속으로는 미국인이기 때문이다.”라는 <풀 메탈 재킷>의 미군 대령의 말에서 그들에게 내면화된 미국우월주의와 백인우월주의에 대한 관념을 읽을 수 있다. 미국우월주의와 백인우월주의라는 이름으로 타자를 지배하려는 침략과 약탈의 제국주의적 행태는 국가와 기업과 군대를 통해서 일상적으로 훈육되는 것이다.      


그들은 타자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고 존중함으로써 공존의 관계를 만들어 가기보다 타자를 지배하려고만 드는 태도를 훈육당함으로써 식민주의라는 야만적인 폭력을 일상화하는 데 기여한다.* 그런 점에서 전쟁의 대리인들인 미국군인들 역시 희생자라고 말할 수 있다. 베트남에서는 그런 식민주의 이데올로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고 미국은 패배했다.      


도대체 왜 그러해야 하는지 알려고 할 필요도 없이 국가의 명령이기에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내면화된 식민주의의 민낯인 것이다. 베트남인들에게 베트남전쟁은 자신들을 침략한 미국이라는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하는 목숨을 건 싸움일 뿐이었다. 자신들의 목숨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 그 행위 자체가 부당할 수밖에 없는 침략자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에 무슨 이념이 필요할 것인가.      


미국의 베트남전쟁 패배는, 베트남인들의 미국에 대한 승리는, 미군 대령의 베트남인들에 대한 내면화된 이데올로기가 허상이었음이 드러난 결과이기도 하다. 원주민들의 자기 보존이라는 본능 혹은 이념이 침략과 약탈이라는 본능 혹은 이념을 이긴 것이다. 전쟁에 침략과 약탈 말고 무슨 정당한 이유가 있을까. 야만적인 전쟁이 계속되는 한 누구도 승자일 수 없으며 모두가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의 한반도 개입에 대한 성찰>(후마니타스 2016)의 저자 장순은 이 책에서 “내가 믿고 싶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미국인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에게 필요하고 원하는 것을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서라도 확보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287쪽)고 쓰고 있다.          



2017.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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