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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생존할 수는 없어

by 영진

생존을 위해서 독립을 해야 하는가. 독립이 아니라 의지하고 협력을 하는 것이 오히려 생존에 유리하지 않은가. 한데 의지하고 협력해야 할 상대가 생존을 위협한다면 그로부터 독립을 해야 하지 않는가. 투쟁을 해서라도, 투사가 되어서라도 독립을 해야 하지 않는가.


독립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고, 협력하지 않고, 다만 생존할 수도 있을까. 인간의 생에서 그럴 수는 다만 생존할 수는 없어 보인다. 독립을 위해 투쟁도 해야하고, 공존을 위해 협력도 해야하는 것이다.


봉오동 전투로 기억하는 홈범도 장군의 생을 잠시나마 돌아보며 자신의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다 간, 또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일제에 맞서 싸웠던 그에게 그의 생에 경의를 표한다.




홍범도가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돌아가신다. 남의 집에서 머슴 생활을 하면서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던 홍범도의 아버지마저 홍범도가 9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신다. 혈혈단신이 된 홍범도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머슴살이를 하면서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다.


그러던 중 홍범도는 애국심이나 희생정신이 아니라 더 나은 환경에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평양 소속의 조선 군대에 들어간다. 남다른 신체 조건에 발군의 사격수로 군대에 잘 적응하는 듯했던 홍범도는 병사들을 괴롭히던 장교를 때려눕히는 사건으로 4년간의 군 생활을 뒤로하고 도망치게 된다.


군대를 떠나 홍범도는 제지소 노동자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3년이 지난 22살이 되던 해에 홍범도가 제지소 주인을 때려눕히는 일이 발생한다. 계속되는 부당한 대우 때문이었다. 오갈 데 없는 홍범도의 사정을 알고 주인이 그를 막 대했던 것이다. 폭력을 일삼는 건 물론이고 임금도 제때 지불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홍범도는 강원도 금강산 신계사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불교 경전을 배우며 지낸다. 거기서 비구니였던 단양 이씨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이씨의 고향이었던 함경남도 북청군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된다. 이때 홍범도가 선택한 직업은 호랑이 때려잡는 사냥꾼이었다.


사냥꾼은 그야말로 홍범도에게는 딱 맞는 천직이었다. 홍범도는 북청군 일대의 대표 사냥꾼이 된다. 사냥꾼으로 인정받게 된 홍범도는 먹고사는 걱정 없이 가족들을 책임질 수 있었다. 늘 생계를 걱정했던 홍범도에게 이때가 가장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홍범도의 평온했던 일상에 또다시 위기가 닥쳐온다. 호랑이를 때려잡던 홍범도가 더 이상 사냥꾼이라는 직업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1907년 일제가 우리의 황제였던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켜버린 것이다.


일본군과 싸우겠다면서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일본은 조선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총을 압수하려고 했다.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만들어 조선 민간인들이 지닌 무기와 탄약을 정부와 관아에서 압수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은 처벌하겠다는 것이었다.


자신을 먹여 살리는 총을 압수당하면 생계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홍범도는 가만히 있다간 총을 뺏길 것 같으니 그전에 총을 뺏으려는 복청군 일대의 일본군들을 때려 잡기로 결심한다. 총을 빼앗겨 굶어 죽느니 놈들과 싸웁시다. 호랑이에게 겨누던 총구를 바로 일본군에게 돌린 것이다.


홍범도의 ‘산포수 의병부대’는 함경도 지역을 종횡무진하면서 1년여 동안 연전 연승의 신화를 써내려 간다. 단 한 번도 지지 않은 홍범도의 전적은 60전 60승이었다. 홍범도를 두려워한 일본군은 그를 ‘날으는 홍범도’라 불렀다.




그런데 이때 홍범도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리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다. 일제가 홍범도의 아내와 두 아들을 납치한 것이다. 결국, 가족이 자신이 항일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죽게 된다. 홍범도는 그것을 개인의 사적인 복수심으로 해소하지 않고 승화시킨다. 이전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홍범도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홍범도에게 일제가 생계를 위협하는 적이었다면 이제부터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원수를 갚지 않는다면 홍범도의 이 비극은 의병 동료 나아가 우리 민족이 함께 겪게 될 아픔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강력한 의병 탄압이 계속되고 있었고 아내와 아들을 잃은 그 해 1908년 홍범도는 조국을 떠나 당시 러시아 땅이었던 연해주로 향했다. 그 곳에서도 의병 활동을 재개하는 게 쉽지 않았다. 러시아가 일본과의 외교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일본이 맞서 싸우려고 했던 항일 무장 세력들을 감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1910년 조선으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온다.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이다. 그로부터 때를 기다리고 있던 홍범도에게 다시 한번 일어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생긴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었고 이후 모여든 의병을 홍범도가 군대 조직으로 재편해서 대한독립군이란 독립군 조직의 대장이 된다. 이때 홍범도의 나이가 52세였다.


홍범도는 통일된 하나의 큰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 북간도 지역 내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을 위해 노력했다. 결국 6개 독립운동 단체의 주요 간부들과 서로 협력할 것을 약속한다. 700여 명에 달하는 연합 독립군의 총지휘를 맡았던 인물이 바로 홍범도였던 것이다.


조선인들이 많은 청산리 지역에서 10여 차례 김좌진 장군과 함께 일본군을 물리친다. 독립군을 섬멸하겠다던 일본군의 계획이 실패한다. 그러자 그들의 칼날이 북간도의 조선 민간인들을 향한다. 일본군이 간도의 이 마을을 포위하고 습격한 뒤에 모든 남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총과 창으로 학살한다. 시체가 재가 될 때까지 태워버린다. 간도 참사는 제노사이드이다.




북간도의 소식은 홍법도에게도 전해지고 당장이라도 조선인들의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독립군 대원들은 굉장히 지쳐 있었다. 탄약과 무기는 많이 부족했다. 게다가 독립군의 근거지 북간도의 기반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홍범도는 또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1922년 홍범도는 모스크바로 간다. 당시 러시아는 내전 중이었다. 무장 단체였던 독립군이 일본군도 개입하고 있던 이 내전에 참가해서 일본군과 싸우는 데 힘을 보태준다면 러시아로부터 무기와 추위 또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는 원조를 받을 수 있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홍범도와 독립군을 지원해 주지 않는다. 심지어 이곳에서 독립군들은 분열되었고 흩어지기까지 한다. 항일 무장 투쟁의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온 러시아에서 독립군마저 잃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범도는 러시아에 남아서 얼마 남지 않은 독립군들과 함께 농업협동조합을 만들어 농사를 지으면서 항일 투쟁을 위한 자금을 모은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홍범도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러시아 관리들이 홍범도를 찾아와 땅을 환수하겠다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그래서 홍범도는 소련 공산당 입당을 선택한다. 공산당원이 되면 신분이 보호되고 동포들을 더 보호할 수 있지 않을까. 안정된 생활을 하니까 독립 투쟁을 준비하는 데 유리하지 않을까 생각했을 것이다.



홍범도가 러시아에서 지낸 지 16년이 흐른다. 어느덧 그의 나이 69세 그런데 1937년 69세의 홍범도에게 갑자기 청천병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러시아에서 살아가는 고려인들에게 다짜고짜 기차를 타고 떠나라는 것이다.


러시아의 한인 동포들이 강제로 이주당한 이유는 일본 사람들과 닮았다는 것 때문이었다. 조선인 중에서 혹시 일본의 첩자가 있을 수 있겠다. 그런 이유로 러시아에서 아주 먼 곳으로 강제로 보내버렸던 것이다. 기차에 타 있던 고려인들은 모두 17만여 명이었고 그 가운데 홈범도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기차는 무려 40여 일을 달려 카자흐스탄에 도착한다. 강제 이주를 당한 6년 후 어느 날 카자흐스탄 고려인 신문에 홍범도의 소식이 실린다.


"홍범도 동무를 곡하노라. 홍범도 동무는 여러 달 동안 숙환으로 집에서 신음하시다가 그만 1943년 세상을 떠나셨다"


광복을 2년 남긴 1943년 일제가 패망하는 모습을 미처 보지 못한 채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한 것이다. 홍범도가 죽기 전에 한마디 유언을 남긴다.


"내가 죽고 우리나라가 해방된다면 꼭 나를 조국에 데려다 주시오"




2021년 8월 15일 카자흐스탄에서 서거 후 87년 만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귀환길에 오른다. 국군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온 장군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무사히 안장된다. 비로소 홍범도의 유언은 이뤄진다.




2025. 8. 13.




이 글은 아래의 영상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벌거벗은 한국사, 홍범도 편. <사피엔스 스튜디오>


일본군 상대로 60전 60승을 거둔 '날으는 홍범도'

일본인을 닮았다는 이유로 강제 이주 당한 시련을 겪은 홍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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