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은희경씨(63)의 첫 장편소설이자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새의 선물>이 최근 100쇄를 찍었다. 1995년 1쇄를 찍었으니 27년 만에 이룬 영예다. <새의 선물>은 화자(話者)인 열두 살의 조숙한 소녀 진희의 시선을 통해 가족과 이웃,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담아낸 성장 소설이다. 이후에도 꾸준히 새 작품을 발표해온 은 작가는 사람 간 관계의 상투성과 그로 인한 진정한 소통의 단절을 이야기했다. 사람과 사랑에 대한 냉소를 경쾌한 농담과 시니컬한 문체로 담아냈다.
-<새의 선물> 100쇄, 소회가 어떤가요.
“100쇄를 찍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이 책을 27년 전에 쓴 거잖아요. 그래서 좀더 각별하게 다가와요. 27년 전 내가 던진 질문이 아직도 유용하다는 거니까요.”
-왜 <새의 선물> 독자들이 꾸준히 있다고 생각하나요.
“100쇄 기념 개정판 작업을 하면서 27년 만에 이 작품을 다시 읽어봤어요. 너무 직설적으로, 내가 마치 다 아는 양 써서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쳐야 할 곳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읽는 과정에서 왜 이 작품이 지금도 유효한지를 생각하게 됐어요. <새의 선물>에는 에너지가 아주 많아요. 그만큼 당시 제가 절박했기 때문이에요. 첫 책인 만큼 한명의 독자도 없었어요. 그러니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얘기 하며 정면대결한 거죠. 그런 패기가 독자들에게 강하게 어필하는 게 아닌가 해요.”
-개정판에서 손본 곳이 많습니까.
“처음에는 많이 고칠까 하다가 지금의 내 방식으로 고치면 이 작품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의 저는 필터가 훨씬 많아서 깎고 깎고 깎아서 작품을 완성하거든요. 문장도 문어체 글로만 쓸 수 있는 사유를 담으려 하고요. 반면 <새의 선물>은 그런 것 없이, 그냥 말해요. 촌스럽지만 원석이나 순정 같은 게 있어요. 그래서 혐오 표현만 고쳤어요. 가령 당시엔 무심히 썼던 ‘앉은뱅이책상’, ‘벙어리장갑’, ‘곰보 아줌마’ 같은 편견과 비하의 의미가 담긴 단어들이요. ‘불륜’도 ‘공인되지 않은 관계’로 고쳤어요.”
<새의 선물>의 화자(話者)는 “삶이 시작부터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열두 살 여자아이 진희다. “나는 열두 살 이후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고 단언할 만큼 당돌하고 냉소적인 진희는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로 자신을 분리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본심을 감추는 방법을 일찌감치 터득한다. 이모와 삼촌, 이웃 등 주변인들의 삶은 이러한 진희의 시선을 통해 섬세하고 유머러스하게 묘사된다.
-어린 은희경은 생각이 많았겠군요.
“내 세계가 따로 있었던 것 같아요. ‘어른들은 이런 아이를 원하겠지?’ 생각하며 행동하는 내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지만 나는 그런 말 안 믿어, 어른들은 다 저렇게 말하고 약속도 지키지 않아’ 하는 불신하는 내가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누구에게도 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그때마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어요. 어쨌든 무사히 성장해 청소년기를 지나 30대가 됐는데 내 안의 내가 자꾸만 질문했어요.”
-어떤 질문이었나요.
“그래서 내가 지금 다 잘 된 거냐는 질문. 잘 살려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돼야 하는데, 그렇게 살고 싶냐는 질문….”
-싫어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
“불합리한 이데올로기라고 여겨도 순응해야 유리하게 사니까요. 일부일처제, 직장 내에서의 서열과 남녀차별 등. 그런데 취업, 결혼 등 사회에서 정해놓은 방식을 성실히 취해왔다고 해서 유리한 어떤 뭔가를 내가 얻었는가 생각해보니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결혼도 해보니까 별게 없었고…. 이렇게 똑같은 삶을 복제하며 살다 갈 거면 나는 왜 태어났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질문을 안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거예요.”
-27년 전 은희경과 지금의 은희경은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턱에 손을 괸 채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제 글이 조금씩 달라졌음을 깨달을 때가 있어요. 그 전에는 제 작품에 대해 독설적이다, 냉소적이다, 위악적이다라는 평가가 많았잖아요. 그에 대해 저도 반감이 없었어요. 정해진 화해나 미봉적 위로를 통해 글이 마무리되는 것에 불만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뭐가 문제인지 똑바로, 정확히 보자는 게 제 생각이었고 그것을 직설적으로 소설에 담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제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많은 분이 어떤 사안들에 대해 이미 문제의식을 느껴요. 그래서 이야기를 바로 출발시킬 수 있게 됐어요. 제 소설이 부드러워진 이유를 나이듦에서 찾는 분들도 있지만, 그건 아닌 거예요.”
-페미니즘 논쟁이 정치권까지 확산됐어요. 요즘 여성들의 삶이나 페미니즘 논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1990년대만 해도 남녀를 불문하고 본원적으로 차별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페미니즘이 자신의 기득권을 침범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당시만 해도 페미니즘이 세력화되진 않았으니까요. <빛의 과거>를 펴냈을 때 말한 적이 있었어요. 40여년 전에도 페미니즘 강좌가 있었고, 저처럼 교육받은 기득권 여성들은 문제의식을 가졌지만 결국 기존 시스템에 안주했기 때문에 젊은 여성들이 아직까지 싸우고 있는 거라고…. 성평등을 이루기까지 여러 어려움이 있겠지만 저는 낙관해요.”
-오히려 남성들이 역차별을 받는다는 일부 2030 남성들의 주장에 대해선 어떤 생각인가요.
“여러 생각이 있지만 한 마디로 정리하긴 어려워요. 다만 사람들이 커뮤니티 등 특정 집단의 선동에 자신의 사고를 위탁하지 말았으면 해요. 자꾸 그러다 보니 반목이 심해지는 것 같아요. 자기 생각을 가지려면 스스로 질문을 해야 해요. 90년대와 비교하면 성평등이 많이 이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기득권자들은 시혜적 시선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원래 내 것인데 조금 준다는 생각이요.”
-문학의 위기, 너무 오래된 화두라 새삼스럽지 않아요. 하지만 이런 현상이 점점 심화되고 있고, 재능 있는 스토리텔링 작가들은 영화나 드라마 쪽으로 많이 가 있어요. 어떻게 받아들이나요.
“과거 어떤 책이 5만부가 팔렸다면 그중 순수 독자는 1만명일 거예요. 나머지는 트렌드 등 어떤 다른 이유로 책을 구매한 건데 그런 분들이 지금은 책을 안 사보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문학을 원하는 순수 독자만 지금 남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현상이 잘못된 것이라는 판단은 유보하고 있어요. 세상이 다양해지면서 문학은 변형된 형태로 존재하기도 하거든요. 게임에도 문학이 있고, 심지어 음식점 마케팅에도 스토리텔링이 있으니까요.”
그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좋아하던 여행과 마라톤을 3년간 못 했지만, 이제 다시 할 것”이라고 했다. “예스24에 산문 연재를 곧 시작한다”는 그는 “차기 장편소설로 ‘몸’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 중”이라고 말했다. ‘왜 몸이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몸이 인간의 조건이자 개인의 조건이니까요. 몸을 통해 삶을 영위하는데, 몸의 조건이 제약이 될 수도 있고 장점이 될 수도 있어요. 또 관계가 될 수도 있고 소멸이 될 수도 있고요. 그래서 오래전부터 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특히 요즘은 주변에서 늙음과 죽음을 많이 봐요. 느끼는 게 있어요. 내년부터 문학동네에 연재할 예정이에요.”
-경향신문, 플랫, 2022. 8. 1. <'63살 은희경'은 '27년 전 은희경'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중에서
2025. 8. 22.
'63살 은희경'은 '27년 전 은희경'에서 무엇을 보았을까[플랫] - 경향신문